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BC 429) 중심으로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BC 429) 중심으로
  • 황인술
  • 승인 2009.08.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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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술 교수     ©독서신문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bc 429)
 
생애
페리클레스와 투구-이마가 비정상적으로 길어 얼굴이 양파처럼 보였기 때문에 페리클레스 동상이나 그림에는 투구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이 ‘양파머리’라고 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각가는 페리클레스의 머리에 투구를 씌워 신체의 약점을 감추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정치가·군인으로 평의회·민중재판소·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해 민주정치의 기초를 만들었다. 외교에서는 주변 강국과 평화를 유지했고,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했다.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아버지는 크산티포스, 어머니는 아가리스테(클레이스테네스 조카딸)였다. 소피스트 교육을 받았으며, 웅변에 탁원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명연설가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자 정적들은 페리클레스를 민중선동가라고 비판한다. 아낙사고라스, 소포클레스, 피디아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 페리클레스와 투구-이마가 비정상적으로 길어 얼굴이 양파처럼 보였기 때문에 페리클레스 동상이나 그림에는 투구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이 ‘양파머리’라고 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각가는 페리클레스의 머리에 투구를 씌워 신체의 약점을 감추었다.     © 독서신문
에피알테스(ephialtes)의 민주주의 개혁을 지지했다. 에피알테스는 급진적 민주주의 지도자로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주의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에피알테스는 암살되었으나 그가 추진한 정치적 혁명은 오히려 페리클레스에 의해 더욱 굳건해진다. 이로 인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가로 떠올랐다.

bc 443년부터 스토라테고스(장군직)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열다섯 번이나 군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문에 ‘지상의 제우스’라 불리게 되었으며, 민간도시 집정관(최고 관리로 임기는 1년)인 아홉 명의 아콘archon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된다. 겉은 민주정(民主政)이나 사실은 일인 지배라 할 만큼 페리클레스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또한 아테네 최전성기이기도 하였다.

bc 431년 페리클레스 정적들은 아낙사고라스·피디아스 등 페리클레스 측근들을 기소하여 페리클레스를 권력으로부터 몰아내는데 성공하지만 페리클레스를 실각시키지 못했다. bc 429년 다시 군사령관에 선출되었으나 전쟁과 함께 아테네에 유행한 흑사병에 걸려 병사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서양 고대문명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리스·로마 문명은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접어드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서양의 패권은 초승달 지역인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슬람권에서 지중해 유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때 형성된 서양문화는 서양문화의 기초가 된다. 때문에 그리스 문명 형성과 아테네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 문명에 이어 미케네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도리아 인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대를 거친 후 아테네, 스파르타와 같은 도시국가(polis)를 형성하게 된다. 폴리스를 대표하는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발전시켰으며 상업과 해상무역에 주력한다. ‘라케다이몬’1)이라 불렸던 스파르타는 일반적으로 과두정(寡頭政) 또는 귀족정 폴리스라 하여, 아테네의 민주정과 다른 성격인 병영국가 정치 체제로, 남자는 집단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과 체력단련에 집중하였다. 엄격한 군사훈련에 의한 청년교육은 ‘스파르타 교육’으로 지금도 ‘스파르타식 교육’은 낯설지 않은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성에게도 체육을 장려하였으며, 농업 중심사회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세계사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초,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제국의 공격을 막아낸 다음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가 제창, 결성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해군동맹)의 맹주(盟主)가 된다. 이에 맹주인 스파르타도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 펠로폰네소스반도 도시국가들의 공수동맹 攻守同盟)을 맺은 뒤 아테네와 대립했다. 

델로스 동맹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에 의해 정치와 문화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게 되며, 이 시대 미술·문학·사상의 중심 국가가 된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에서(펠로폰네소스 전쟁) 스파르타에 패하게 되며, 이때부터 아테네의 힘은  점차 쇄약해지며, 기원 전 4세기 중엽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와 페리클레스
오늘날 민주주의를 말할 때 그리스 아테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민주정의 기초인 정치개혁이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500인 회의를 통해 시민의 뜻을 대변하는 중심기관인 민회를 설립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였으며, 참주의 출현을 막기 위한 도편추방제 등을 도입하였다. 

이를 이어받은 페리클레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이념을 더 발전시켜 정기적인 시민 총회인 민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중요한 문제들은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시민총회(민회民會 comitia)2)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민회는 전쟁을 할 때는 병원회(兵員會)가 되었으며, 화전(和戰)·역병(疫病)대책·신탁(神託)대책 등을 논의하였다. 아테네의 민주정치 기간에는 가장 실력 있는 국사(國事)의 최고·최종 결정기관으로,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남자는 모두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업이 중요한 남자들은 민회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족수(定足數:약 6,000명)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막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민회 출석자에게 적절한 보수를 주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계기가 된다. 여성, 노예, 외국인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회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제한적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아테네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 오늘날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주의이다)
 
추천으로 선출된 되는 사람들은 보통 1년 임기로 대부분의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으며, 화평(和平 ; 나라 사이가 화목함) 및 행정에 관련된 일 처리, 입법·사법·재정 등 모든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결정은 다수결로 하였으며, 거수 혹은 항아리 속에 투표용 조가비를 넣어서 하였다. 아테네의 민회는 처음에는 아고라에서, 다음에는 푸니쿠스 언덕에서, bc 4세기 이후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개회하여 보통 연 40회(그 밖에 임시회도 있었다) 열렸다. 이와 같이 봤을 때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 발상지를 아테네로 여기는 이유이다.
 
페리클레스 연설에 나타난 민주주의
명문 귀족 출신 페리클레스는 소수 귀족보다 다수인 민중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결정하였으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 아테네 민주주의를 최상의 수준으로 높였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연설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자유에 의한 기풍 속에 자라면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지닌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단력으로 시련을 이겨냅니다.” 

“우리 정치체제는 다른 나라 제도를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상을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 하여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범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소수에 의한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가 참여하는 제도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다 공평하게 공직을 맡을 수 있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우리 아테네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미(美)를 사랑하지만 절도 있게 사랑한다. 우리는 지(知)를 존중하지만 거기에 탐닉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富)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할 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은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함은 깊이 부끄러워한다.”

어휘정리

1) 민주주의(民主主義), 귀족정치(貴族政治)
다수 의사에 의한 통치체제를 뜻한다. 소수 최선자(最善者)에 의한 통치체제는 귀족정치aristocracy(rule by the best few)라 부른다.
 
2) 광장(廣場) 민주주의와 연설
도편추방제에 의해 추방 된 데모스테네스, 아테네가 전성기를 이룰 수 있게 한 페리클레스, 클레온 등은 광장에서 나랏일을 처리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들은 플라톤이 불렀던‘폴리테이아(politeia ; 국가 또는 정체政體, 그리스어 : πολιτεία), 로마인들의 ‘레스푸블리카(respublica ; 공공사물公共事物이라는 뜻의 라틴어. 넓은 뜻으로는 국사國事·국가제도를 뜻하며, 영어의 ‘republic’과 같이 ‘공화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에 대해 연설 했다.
 
광장에서 행하는 연설은 분위기가 장엄하고 정중한 의식이었다. 명연설들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어 열광하게 만들었으며, 조국애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분노의 함성이 터지게도 하였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연설에 대해 이성을 의미하는 ‘라치오(ratio)’에 'o'를 붙여 연설을 의미하는‘오라치오(oratio)’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연설가들을‘오라톨(orator)’이라고 불렀다. 연설은 이성으로 하는 말, 이성을 통한 설득으로, ‘이성의 능력’에서 나온 것으로, ‘이성적 존재’는 말로 ‘소통’이 가능하고, ‘설득’이 가능해야 함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 민주주의에도 적용된다.
 
3) 여론광장, 공개 토론, 토론의 장(場) 
서양의 도시들은 중심부에 광장을 두어 시민들의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  시장인 아고라는 아테네 시민들이 여론(public opinion)을 형성하던 장소이다. 민주정치 출발점은 자유토론(free discussion)을 통해 합의(consensus)를 도출하는 것이다.
 
4)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추방은 당사자의 명예나 시민권 ·재산권과는 상관없이 시효(時效) 기간만 지나면 귀국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며, 아테네에 재산관리인을 둘 수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아니었고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원래 참주(僭主)의 재현을 막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평민 지도자이며 장군인 페이시스트라토스 참주가 죽은 후, 클레이스테네스가 설치하여 bc 487∼bc 485년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아르고스에서도 실시되었고, 시라쿠사에서도 똑같은 목적으로 엽편추방(葉片追放)이 실시되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아테네의 오스트라키스모스였다.

추방자 결정방식은 이른 봄 민회(民會)에서 오스트라키스모스 시행의 가부(可否)를 거수로 결정하고, 아고라에서 국가에 해를 끼칠 위험한 인물의 이름을 도편(陶片:오스트라콘)에 기입하는 비밀투표를 하였다. 총 투표자수가 6,000명을 넘으면 유효 투표가 되어, 단순다수결 방식(과반수majority)으로 추방자가 결정되었다고도 하고, 6,000표 이상의 최고 득표자가 추방되었다고도 전하나 확실한 정설(定說)은 없다.
 
5) 도시국가(都市國家 polis)  
그리스는 평야지대가 적고, 산간분지가 많아 소규모 폴리스가 발달하였다. 폴리스는 서로 독립되어 독자적인 정부를 가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이다.
 
6) 민중선동(데마고기demagogy)
선동정치가가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인 의도로 유포시키는 선동적 허위선전. 흔히 줄여서 ‘데마’라고 하여 단순한 소문·풍문이나 유언비어(流言蜚語)와 혼용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소문·풍문은 대체로 한정된 개인들 사이에서 사사로운 흥미나 관심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대중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 유언비어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는 연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지만 반드시 의도적인 날조나 허위의 정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데마고기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집단·세력 또는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에 관하여 대중 사이에 유포시키는 왜곡(歪曲)과 중상(中傷)을 포함하는 선동적일 경우가 많다.

데마고기의 힘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조건에 의하여 결정된다.
① 그 내용이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을 유발하는 중요성을 가져야 하며

② 그 사항에 대하여 확정적인 판단을 내릴 충분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고, 그런 의미에서 사태가 애매한 것일 때 힘을 얻게 된다. 특히 사회 변동기에 데마고기가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데마고기는 이러한 조건을 이용하여 일반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한편, 가공적(架空的)인 인과관계의 상정(想定)이나, 사실의 왜곡을 교묘한 언어로 보충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의도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사태에 관한 대중의 인지구조(認知構造)를 형성한다.
 
7) 선전(宣傳, propaganda)
어떤 사물의 존재나 효능, 주장 등을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 또는 그 활동. 16세기 그레고리우스 13세 통치하의 로마에서 신앙의 보급(데 프로파간다 피데)을 위한 교단이 설립되었는데, 이때 사용되었던 ‘프로파간다’라는 라틴어를 그대로 ‘선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선전은 발생적으로는 종교상의 포교(布敎)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 선전활동이 전개되는 장(場)은 인간생활의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종교·도덕·정치·사상·경제 등 광범한 분야에 이르고 있다(단, 상품에 대한 소비 대중의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한 상업선전은 광고로 구별함).

생각해 보기
아테네 민주정은 제한된 민주 정치로 직접 민주주의였으며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의제(代議制)에 의한 간접 민주주의이다. 대의제란 국민이 직접 국가의 의사를 형성하지 않고, 그 대표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고 그에 구속되는 국가 의사 결정의 원리이다. 간접 민주제 또는 대표 민주제라고도 한다. 이 둘의 장·단점을 비교해 보세요.
 
주석
호메로스의 서사시(敍事詩)에서는 이 두 명칭이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전시대에는 ‘라케다이몬’은 도시국가의 정식 명칭으로, '스파르타'는 중심도시의 명칭으로 구별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도시국가를 일반적으로 스파르타라고 부른다.
호메로스 서사시에서는 아고라(agora), 아테네에서는 에클레시아(ekklēsia), 스파르타에서는 아펠라(apella), 그 밖의 고린투스의 폴리스에서는 할리아(halia), 또는 할리아이아(haliaia)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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