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근원은 어머니의 헐벗은 품속"
"내 문학의 근원은 어머니의 헐벗은 품속"
  • 독서신문
  • 승인 2009.06.0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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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사)한국시인협회 회장
 
▲     © 독서신문

 
나는 중학교 때부터 내 뜻과는 상관없이 운명이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신나는 구석이란 없었다. 그래도 어릴 적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시와 소설을 많이 읽고 쓰고 했다.

1학년 때 신춘문예에 시 한 편을 응모해 봤더니 최종심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지만 당선된 시가 꼭 내 것보다 좋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아무도 몰라주는 비극의 천재시인이 되려는 고통의 악몽을 꾸면서 지냈다. 어쩌다가 2학년 때 학교신문 기자가 되었는데 하루는 게재할 학생작품이 없어서 난롯가에서 끼적거리고 쓴 콩트를 가명으로 실었다.  그 후 신춘문예 광고가 요란스럽게 나던 날 나는 각 신문사마다에 시를 세편씩 골고루 응모하고, 학교신문에 게재했던 콩트를 「철이와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동화 부문에 응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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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해에 각 신문사 신춘문예 시 부문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석권하려던 나의 꿈은 사라지고 이놈이 나의 첫 데뷔작이 되어 나는 『새벗』과 소년동아일보에 동화를 써서 받은 원고료로 1년도 넘게 낙원동 다락방과 종로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3학년 때부터 나는 소설습작을 본격적으로 했다. 거의 미친 듯이 소설 쪽에 매달렸는데 시를 써봐야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배신감과 나의 청년기의 바람기가 어울려 그렇게 된 것이다. 그해에 나는 각 신문사마다 소설을 응모했는데 그동안 소년시절부터 습작해온 시가 어쩐지 아까웠다. 시를 그냥 내던지려니까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이제 정말로 시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중앙일보에 투고했다. 그랬더니 시는 당선되고 소설은 모조리 낙선이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어째서 이렇게 연거푸 나의 뜻이 빗나가는 것인지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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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없어서 진달래꽃 따먹고 송기를 해먹고 콩서리를 하면서 보낸 나의 어린 시절이지만 내가 이렇게 동화도 쓴 것을 보면 그리고 지금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시와 소설로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걸 보면, 그때의 나의 소년시절이 결코 기아와 질시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민들레꽃처럼,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어디 끝 간 데 없는 끈질긴 애정이 그 밑바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제 운명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면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야뇨증이 심했던 나에게 그러한 빈궁이 어찌하여 끈질긴 애정의 근원이 되고 있을까. 어머니, 나의 어머니다. 배운초등학교 터를 잡을 때 어느 유명한 지관이 말하기를 “장차 이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 큰 인물이 나온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나에게 수없이 들려주신 어머니, 그 분이 바로 이 모든 불가사의한 애정의 밑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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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지만 나는 지금도 어머니 품속에 있는 백운명 평동리의 탁번이에 지나지 않는다. 영양실조에 기생충에 야뇨증이 삼한 탁번이지 대학교수에, 작가에, 위크엔드 양복을 입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신사가 아니다. 정말 나의 문학의 근원은 어머니의 헐벗은 품속, 이미 나를 낳을 때는 젖이 말라붙어서 미음으로 나를 키운, 서른세 살에 홀로 되신 어머니의 운명 속에 있다. / 김경배 기자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생
고대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국문학과 졸
문학박사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다 2008 정년퇴임
현 (사)한국시인협회 회장
 
경력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
 
저서
시집으로 『아침의 豫言』, 『겨울강』, 『벙어리 장갑』, 『생각나지 않는 꿈 』외 다수
소설집으로 『處形의 땅』, 『내가 만난 女神』, 『절망과 기교』, 『純銀의 아침』외 다수
연구서로는 『외탁번 詩話』, 『현대시의 이해』, 『시인과 개똥참외』외 다수
 
수상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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