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푸근함과 카타르시스적 흡인력의 매력”
“고향의 푸근함과 카타르시스적 흡인력의 매력”
  • 안재동
  • 승인 2008.10.2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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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수필가 정목일의 신간 수필집 『모래밭에 쓴 수필』 ◀
▲ 정목일 수필가     © 독서신문
나무들은 일 년을 주기로 계절마다 새로워짐으로써 일생을 충실하게 영위하며 한 줄의 나이테에 지난 삶을 기록한다. 어느새 회갑을 넘겼다.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중략)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단 하나의 완성, 작은 것일지라도 나의 꽃을 피워 보았으면 좋겠다. (중략) 정작 나는 인생에 몇 줄의 목리(木理)를 짜 놓았을까? 나는 ‘수필’에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수필과 벗하며 고독의 길을 걸어왔다. 수필을 통해 마음을 씻어낼 수 있었고, 아픈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목리」 중에서

 
정목일(鄭木日) 수필가. 그는 1945년생으로 1975년에 《월간문학》, 1976년에 《현대문학》지에 당선과 천료를 각각 받으며 수필문단에 데뷔하였다.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 그도 환갑을 넘긴 상황이다. 그런데 나이와 개성(이미지)은 정말 무관하기라도 하듯, 지금 그의 모습도 적지 않게 멋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람의 아름다움은 가꾸기 나름이라고 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측면일 수도 무형적 그 무엇일 수도 있다.

필자는 정목일 수필가를 실은 잘 모른다. 실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이 필자의 머릿속엔 제법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정 수필가에 대해선 지금까지 몇몇 채널로 소식을 들어 왔는데, 때론 인쇄매체를 통하여, 때론 전자매체를 통해서다. 비록 간접적이긴 하나 그렇게 소식을 자주 접하다 보니 어느새 그리 되었다고나 할까.

사람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일단 기억에 머물게 마련이고, 좋은 쪽이거나 나쁜 쪽이 일반적이다. 그도 아니면 쉬 소멸된다. 정 수필가의 경우 내겐 항상 좋은 편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의 좋은 글을 대할 기회가 잦고, 수상(受賞) 또는 출간 등 이따금씩 들리는 좋은 소식들 때문에 또한 그러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주어진 환경에 따라 때론 빈번히 때론 드물게, 그러면서 끝없이 자신의 외적 정보와 교류하게 된다. 그것은 요즘 흔한 활자매체나 영상매체에서 받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단지 소문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필자 역시 평소 끊임없이 외적 정보들에 향해 눈과 귀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필자는 문인이기에 특히 문인이나 문학 관련 자료들에 촉매가 민감한 편이다.

문인의 이미지는 모름지기 ‘문인다운’ 풍모가 있어야 제 멋일 것이다. 故김춘수, 유치환, 서정주 시인이나 피천득 수필가, 박경리 소설가 등도 그런 경우라면 경우일 수 있겠다. 주위에선 명색이 문인이긴한데 도무지 문인다운 멋과 티가 나지 않는 경우도 더러 보게된다. 그런데 정 수필가의 경우는 내겐 참 멋이 느껴지는 문인으로 형상화 되어있다.

그래서 그런지, 앞의 글 「내 인생의 목리」에 대한 느낌 역시 퍽 새로우면서 강하다. 「내 인생의 목리」는 정 수필가의 신간 『모래밭에 쓴 수필』의 서문에 적힌 글이다.

《문학수첩》사를 통해 상재된 273쪽의 두툼한 이 수필집은 제1장 ‘별에 대한 단상’, 제2장 ‘타악기의 명인’, 제3장 ‘연꽃의 집’, 제4장 ‘아름다운 간격’ 등 4개 파트에 걸쳐 「물시계 속 세상」, 「5별에 대한 명상」, 「간이역을 생각하며」, 「가청음역」, 「영혼의 램프」 등 52편의 수필을 담고 있다. 필자가 바라보는 정 수필가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정도로 다분히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수필집으로 여겨진다. 


얼마 전 나무 떡살을 하나 구해 어머니 방에 걸어 두었다. 국화 무늬와 빗살 무늬가 새겨진 떡살이다. 삶도 인생도 어쩌면 맛이 아닐까. 생활 속에서 느끼는 희비애락(喜悲哀樂)도 맛이 아닐까. 어머니는 이 떡살 무늬를 보면서 지나온 세월 속에 무엇을 생각하실까. 떡살은 결국 삶의 의미와 맛을 새겨 둔 기구가 아닐까. 벽에 걸린 떡살의 국화 무늬처럼 내 삶에도 그런 향기와 맛을 빚을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있었으면 한다.
 
―「떡살을 보며」 중에서


본 수필집의 특징이 또 하나 있다. 책 속의 요소요소에 컬러로 배치된 삽화이다. 글만 계속 읽어도 결코 지루하지 않을 작품들인데, 덤으로 정겨움과 재미를 선사하는 삽화들까지 풍성하게 곁들였으니 그 의미를 더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문학과 미술(삽화)이 얼마나 조화로운지 금세 취흥(趣興)에 빠지게 되리라.

이 책에 든 삽화들은 이목일(李木日) 화백의 작품이다. 정 수필가와 이 화백은 성(姓)이 다를 뿐 이름은 같아서 매우 관심을 끈다. 나무(木)와 해(日). 같은 이름으로 이 책에 맺어진 수필가와 화가, 두 예술인의 삶과 예술혼이 아름다운 글과 그림으로 책 속에서 잘 어울림 되어서 정말 보기 좋다.

‘제주도’,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겠지만, 제주도의 ‘색깔’ 역시 보는 이마다 느낌이 조금씩은 다르리라. 수필가 정목일에게 비친 제주도의 색깔은 어떨지가 궁금하다.


제주도에 오면 영혼의 눈이 깊어진다. 아름다운 광경을 많이 접하기 때문이리라. 제주도 탄생 설화가 깃든 혼인지(婚姻池)에 가 본다. 제주도의 근원지에 가 보아야, 이 섬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리라. (중략) 제주의 나뭇잎은 맑은 햇살이 살아 있고 파도도 찰랑찰랑 스며있어 도톰하고 푸르죽죽한 게 더 없이 싱싱하다.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제주도의 나뭇잎이 되어 맑은 햇살과 바람을 받으며 살고 싶다. 화산으로 분출된 구멍이 난 돌이 되어 오래오래 영혼 깊숙이 파도 소리를 맞아들이고 싶다.

―「제주도 빛깔」 중에서


한국의 많은 수필가들 중에서 수필문학, 오로지 그 한 길만을 긴 세월 묵묵히 걸어온 작가가 몇이나 될까. 요즘 적지 않은 문인이 수필과 더불어 시도 쓰고, 시를 쓰면서 수필도 발표한다. 게다가 시와 수필의 세계를 넘어 소설이나 평론 장르까지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는 일도 예사다. 하지만, 정목일 수필가는 문단 데뷔 이래 수필영역을 남달리 지켜 온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진정한 ‘한국수필문학 브랜드’라 칭하고 싶다.

 
인간은 왜 물을 찾아가는 것일까. 인체의 70퍼센트가 수분이기 때문일까. 물은 생명체의 신비와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다고 한다. 물은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하며 지상, 지하, 천상으로 이동한다. 끊임없이 순환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물. 어쩌면 이것은 영원한 모습이자 생명체의 지서가 아닐까. 불교의 윤회설 또한 물의 순환과 교류에서 얻어졌는지 모를 일이다. (중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읊었던 천상병 시인처럼 누구라도 돌아갈 것이다. 기체로 변하여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나 또한 영원 속에 물처럼 흐르며 순환할 것이다.
 
―「물의 고향」 중에서

 
정목일 수필가의 작품은 단번에 독자의 관심을 흡입하는 매력이 있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인생철학이 내포돼있어 보인다. 이번 수필집에 든 많은 작품에서도 역시 그런 특성을 느낄 수가 있는데, 자연(自然)에 대해, 그리고 저자의 知人, 여행지, 수필 등에 대해서도 정 수필가 특유의 사색과 깨달음 혹은 철학 등을 쉬 인지할 수 있다.

 
남강의 하얀 모래밭은 강물이 펼쳐 놓은 만년 명상록이자, 내 사색의 영토이기도 하다. 나는 그 정결한 명상록에 무엇을 써놓을까를 생각한다. 수필은 논픽션이기에 진실과 순수를 생명으로 하며, 문장은 곧 인생 경지를 보여 준다. 나는 마음속에 샘을 파고 탐욕이라는 때와 어리석음이란 얼룩과 분노라는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내고 싶다. 마음속에 종을 달아 두어 깨달음의 종소리를 듣고 싶다.

―「남강 모래밭에 쓴 수필」 중에서

 
수필은 창작이 아니라느니 문학이 아니라느니 하는 언감(焉敢) 설(說)도 일각에서 이따금 돌출되기도 하는데, 정 수필가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런 설들이 일순 무색해지고 말 것이다. 그만큼 정 수필가의 작품은 여느 문학 장르 못지않게 높은 문학성을 지니고서 독자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빗소릴 듣는다. 심장이 뛰고 있다. 노란 창포꽃이 금관보다 찬란해 보인다. 안개 속에 1억 년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나는 크게 깊은 숨을 내쉰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눈인사와 미소를 나누고 싶다. 비 내리는 우포늪의 한순간이 영원의 한 부분인가 싶더니, 영원의 한복판임을 느낀다.
 
―「화석을 꿈꾸며」 중에서
 

정 수필가의 작품들은 생경스럽지 않고 친근하다. 그렇다고 오래전부터 들어오던 진부한 이야기들도 아니다. 피천득 수필가는 수필을 ‘청자연적(靑瓷硯滴)’이라고 비유하기도 했지만, 정 수필가의 수필은 사색적인 멋이 있다. 그러면서 편안하다. 그래서 친근함이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이번 수필집에서 보더라도,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새 몸이 고향에 가 닿은 듯 푸근해지면서 복잡한 일상에서 흐트러진 혼미한 정신이 카타르시스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profile]

정목일 수필가는 경남 진주 출생이다. 경남문인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경남문학관장과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을 맡고 있다.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며, 계간 수필전문지 《선수필》 발행인이기도 하다. 현대수필문학상과 gs에세이문학상 본상, 한국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수상하였으며,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 『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 『만나면서 떠나면서』, 『모래알 이야기』, 『달빛 고요』 등 많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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