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드 후설 (Edmund Husserl, 1859년 - 1938년)
에드문드 후설 (Edmund Husserl, 1859년 - 1938년)
  • 황인술
  • 승인 2008.05.3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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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문드 후설     © 독서신문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중 하나로 자리 잡은 현상학의 체계를 세운 유대인계 철학자로 체코 프로스테 요프 모라비아 프로스니츠에서 출생했다. 라이프치히대학교 ·베를린대학교 · 빈대학교에서 수학 · 철학을 공부하였다. 1883년 수학과에서 「편차 계산론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f.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은 후 1887년에 「수의 개념에 관하여: 심리적 분석」 논문으로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최초 저작인 『산술의 철학』(1891)은 수학과 심리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논리학 연구』(2권, 1900∼1901)는 순수논리학, 논리주의적 현상학을 기초로 씌어진 저작이다.

1907년 괴팅겐대학교 강의에서, 처음으로 현상학적 환원(還元)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현상학적 환원에서 이끌어낸 결론은 ‘순수의식의 직관적인 본질학’으로 현상학이었다. 이후 후설은 『엄밀한 학문으로 철학』(1910∼1911)과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고안(1913)을 발표하여 현상학을 완성(完成) 시킨다. 『데카르트적 성찰』(1931)은 상호 주관성 문제, 『유럽 여러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1936)은 일체의 인식이 성립되는 궁극의 장(場)으로 ‘생세계(生世界)’의 문제를 제기해 나간다.

 

현상학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이란 현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 철학사조로 살아있는 인간 경험을 연구하려는 철학적 접근이고 연구이다. husserl 현상학은 사물 그 자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경험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즉, 현상학은 ‘스스로를 드러냄’ 또는 ‘스스로 드러내는 대로 그 자체를 볼 수 있도록 해줌’을 말한다. 현상학은 어떤 선입견이나 이론의 개념들에 의해 방해 받지 않고 경험세계에 기초하여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퐁티는 언제나 ‘어떤 것의 본질이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뜻에서 ‘본질에 대한 연구’라고 현상학을 정의했다.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 사르트르(1905-1980), 퐁티(1905-1989)의 주요 개념은 구체화(embodiment), 세계내 존재(being-in-the-world)이다. 구체화란 인간이 의식을 통해 세계 내에 존재함을 신체를 통해 접근, 체험하여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세계내 존재란 세계 속에 다른 존재자와 교섭을 가지면서 존재하고, 존재에 관심을 두는 현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르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현상학은 대상자가 사물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표시한 내용을 분석하여 인간이 경험한 현상의 의미를 밝히는 것(parse)이다. 현상학적 방법은 인과관계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연구의 목적은 연구하고자 하는 현상의 경험을 정확하게 묘사,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일상 경험들의 본성과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있다.

 

후설의 현상학

19세기 중반 유럽은 경험에 기초한 자연과학이 발달함과 동시에 여러 철학 사조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이다. 자연주의는 물리학적 방법이 모든 학문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적 입장이며 역사주의는 역사학을 기초로 모든 역사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흐름을 보고 후설은 유럽 학문에 대한 위기를 느끼며, 현상학적 위기의식이 그의 최초 논문인 『산술의 철학(philosophie der arithmetik)』을 쓰게 되고 여기서부터 현상학이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후설은 산술의 모범에 따라서 모든 주체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를 과학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객관화하는 데서 시작한 위기 상황에 대한 철저하고 성실한 회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모든 과학과 학문이 산술화 되면서 보편화되고, 사회과학과 인문과학까지도 과학화를 위해 산술화 되었을 때 그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이규호, 『대화의 철학』, 시공사, 1999, 83쪽) 즉, 물리학적 방법은 자연을 수학화하여 자연에 대한 인식의 힘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이는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역사적인 사실까지도 추상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지향성(intentionality)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지향성은 마음이 일단 움직이면, 언제나 어느 종류의 대상에 닿으려고 그곳을 향해 움직여 나가려고 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지향성을 통해 자연주의 물리학적 방법으로 불가능했던 인식의 대상과 주체를 연결시키고,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음으로 정의되며, 이 지향성은 의식하는 인식의 주체는 지향성의 원리인‘본질 직관’에 따라 대상을 ‘나타난 그대로’ 또는 ‘지향된 그대로’의 현상으로 의식이 지닌 본질적인 속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의식은 의미를 구성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을 말한다.

대상과 그를 향한 의식의 지향성은 그 본질구조에서 독특한 상관관계가 있다. 의식의 대상이 없는 의식은 없으며 의식 작용이 없는 의식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후설은 의식의 자발성, 발전성, 형식성의 성격으로 소통 가능성의 의도, 의도된 행위 자체에 내재한 인식에의 바람으로 사적인 것으로 우리 정신은 그 사적 체험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의지 이 의사소통의 의도로 ‘무엇에 관한 의식’인 지향성을 노에시스noesis(‘사유’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로 의식 행위의 본질적인 구조)라고 불렀으며, 초월자아의 소산인 ‘무엇’을 노에마noema(‘사유된 것’을 말하며 행위에 대응하는 개관적인 것)로 지칭했다. 노에마는 의식의 내용적 성격으로 의식을 향하고 결정하는 것은 노에마(의식내용)이고, 노에마가 없다면 의식대상도 없다. 주체는 내용 파악을 통해서 존재(사물)를 인식하며, 따라서 내용은 인식대상(인식목표)으로 가는 경로·지도이다. 사고내용이 없다면, 어떤 생각도, 표상도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라 하며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각기 다른 대상에는 각각의 본질 구조를 가진 노에시스가 있으므로 서로 다른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가 있다. 따라서 특정 대상 영역과 관련한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의 구조 해명을 통해서 그 대상 영역에 고유한 존재 원리 및 인식 원리의 해명을 위한 실마리를 획득할 수 있다.

둘째,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는 모든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감각을 통해서는 직접 파악되지 않은 본질적 대상과 내재적 반성을 통해서만 대상화될 수 있는 의식의 지향성이 있다.

셋째, 현상학은 경험 과학이 아니라 현상의 본질 구조를 탐구하는 본질학이므로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는 불변적이며 초월적 시간이다. 이렇게 노에시스가 노에마와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형성시켜가는 과정을 후설은 구성(konstruk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대상과 존재는 주관에 의해 구성된 존재로 의미가 파악되어 존재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현상학은 인간의 문제를 탐구하는 대부분의 개별학문들에게 인간 중심주의의 학문 방법적인 틀을 제공해서 큰 영향을 끼쳤다.

 

읽어보기

19세기 말부터 학문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의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자. 이 평가의 전환은 학문들의 학문적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문 일반이 인간의 現存在에 무엇을 의미하였고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근대인의 세계관 전체가 오로지 실증과학實證科學에 의해 규정되고 實證科學에 의해 이룩된 번영에 전적으로 현혹되어, 진정한 인간성에 결정적 의미를 지닌 문제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었다. 단순한 事實學은 다만 사실인事實人을 만들 뿐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학문들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 전환은 불가피하였고, 그 결과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과거 학문의 實證主義的 경향에 대한 적대적 태도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듯이, 이러한 事實學은 우리 삶의 절박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불우한 시대의 대격변에 내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事實學 자체에는 인간에게 화급한 질문-이러한 인간의 現存在 전체가 의미 있는가 혹은 의미 없는가-이 원리상 배제되어 있다. 이 질문이야말로 모든 인간에 관련된 보편적이고 必然的인 것으로, 보편적 성찰과 이성적 통찰에 기초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그 문제는 인간 세계나 인간 이외의 주변 세계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 태도를 취하는 자로서의 인간, 즉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성적으로 형성하는 가능성을 지닌 자유로운 인간에 관한 것이다. 이성이나 비이성에 대해 그리고 자유의 주체인 우리 인간에 대해 학문은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단순한 物質科學은 분명히 이 점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며, 더구나 주관적인 것 모두를 배제한다.

다른 한편 특수한 학문 분야와 일반적 학문 분야 모두에서 인간을 정신적 現存在로 다루는, 즉 역사성의 지평에서 인간을 고찰하는 정신과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精神科學이 엄밀한 학문이 되기 위해서 탐구자는 모든 평가적 태도-즉 주제가 되고 있는 인간성이나 인류의 문화적 자산資産들이 이성적인가 비이성적인가 하는 문제-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는 물리적 세계든 정신적 세계든 세계를 사실 그대로 파악하고 확정해야 한다고….

그러나 만일 학문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확정 가능한 것만을 참이라고 간주한다면, 만일 정신적 세계의 모든 형태들, 즉 그때그때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이성理想과 규범規範이 일시적 파도와 같이 형성되고 다시 소멸하는 것이고, 이것들은 과거에도 항상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따라서 이성은 부조리不條理가 되고 선행善行은 재앙災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칠 뿐이라면, 세계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현존재現存在는 진실로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위안을 느낄 수 있을까? 역사적 사건이 환상적 비약飛躍과 쓰라린 환멸幻滅의 끊임없는 연쇄連鎖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살 수 있을까?

- <후설 저서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발췌 : 서울대 2005년 수시 기출 지문>

- 참고서적 : 박정호, 『현대 철학의 흐름』, 동녘, 1999
▲ 황인술 교수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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