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 황인술
  • 승인 2008.05.1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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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술 교수     © 독서신문
독일의 경제학자·정치학자로 헤겔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 제창자, 공산주의 혁명가로 1818년 독일 라인주(州) 트리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고 한때 청년헤겔학파의 주도적인 인물이었으나 곧 이 학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된다.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 반정부신문인 라인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라인신문이 정부에 의해 폐간된 후 1843년 파리로 이주하여, 아놀드 루게와 독불 연보를 발간하고, 여기에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기고하였다. 당시 독일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헤겔의 철학을 알게 되며,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4년에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神聖家族)』을 저술하여 청년헤겔학파인 바우어 및 그 무리의 견해를 비판한다. 1845년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하여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하고, 여기서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다. 이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는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공격을 사실상 완결 지었다고 할 수 있다. 1848년에는 역시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1849년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이곳에 살면서 정치경제학 연구에 몰두한다.

마르크스는 1850년대 이후 계속된 정치경제학 연구와 더불어 공산주의혁명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 노동조합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 내란』, 『고타강령 비판』(1875)이라는 중요한 저작을 내놓았다.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과 자신의 건강 악화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던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마르크스의 딸 셋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응접실 게임인 ‘고백’-요즘에는 흔히 ‘프루스트 설문’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860년대 중반 그들은 아버지를 불러서 심문을 했다. 다음은 그의 답변이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미덕은: 단순함

당신이 남자에게서 제일 좋아하는 미덕은 : 강함

당신이 여자에게서 제일 좋아하는 미덕은 : 약함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악덕은: 노예근성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책에 파묻히기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꽃은 : 월계수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빨강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de omnibus dubitandum(모든것은 의심해보아야 한다) 

 - 출처 : 프랜시스 윈, 정영목 역, 『마르크스 평전』, 푸른숲, 2001, 528-529쪽


 


‘young marx’와 ‘old marx’의 철학적 입장의 차이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이 세운 본대학에 가서 헤겔 좌파에 합류하여 많은 신학자들과 만난다. 신학자 중에서 포이에르 바하는 마르크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 바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포이에르 바하는 ‘실증적이고 감각적인 확실한 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증적이고 감각적인 확실한 인간학적 규정에만 머물고 있는 포이에르 바하와는 달리 맑스는 인간규정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세계, 즉 실천의 결과로서 세계를 이것인 제 1전제와 중재하려고 했다.

이 당시에는 아래 표와 같이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프러시아에 동조하느냐 안하느냐로 나뉘게 된다.

▲     ©독서신문

 
표에서와 같이 헤겔의 1세대인 우파들은 프러시아 독재는 ‘합’이라면서 프러시아에 대해 애국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합’인 프러시아는 완전한 상태의 정치체제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세대인 좌파는 그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러시아는 독재국가이며 헤겔이 말한 절대자유에 위배된다고 봤던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정신의 인식과정에 대한 탐구로 의식이 사물에 대한 감각적 확신에서 출발해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헤겔은 인간의 의식이 경험하는 첫 단계는 감성(각)적 확신이라 했다. 즉, 의식은 처음 감각적인 확신에서 출발하여 오성(悟性)과 지각(知覺)으로 다시 그 확신의 결과물에 대해 이성(정신)으로 단계적으로 이행해간다. 이러한 과정은 인류의 역사관과 연관 지어 해석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자유의식이 성장해 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식은 본래 존재하는 자기의식과 그 자기의식을 검증하는 또 다른 자기의식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절대적 의미의 지(知)를 통해 이념을 가지게 된다. 즉, 이념이 이성을 스스로 풀어가는 과정인 것과 같이 역사도 이성이 있는 것으로 봤다. 역사에 이성이 있다는 것은 역사도 시대정신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역사(세계사)는 정신(이성)이 자유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므로 역사가 인간들의 자유의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유의식은 개인을 세계정신의 도구로 삼는다. 18세기 나폴레옹은 이러한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근대국가가 탄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제국가는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고 근대 시민의식(국민국가)이 발현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헤겔은 “개인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세계정신의 도구”라고 했다.

역사적(세계사적) 개인(인물-나폴레옹)의 영웅화를 통해서 즉, 시대정신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이 바로 이러한 역사적 개인 속에서(나폴레옹을 통해서 근대 시민의식이 성장되었다.) 체현됨과 같이 구성원 개개인이 모여 집단을 만들고 그 구성원 개별자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짐을 알 수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이 자유를 인식하는 능력은 이성에 따르는 능력이라고 했다. 대상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자유와 이성능력이고 이 이성능력에 의해 비판적 사유를 하게 되는 것이다. 비판적 사유에 의해서 반성은 이루어진다. 반성은 윤리와 도덕적 측면에서의 반성이 있고 인식론적 반성이 있다. 인식론적 반성은 개별을 통해서 보편을 인식하는 사고과정의 능력을 말한다. 보편에 의한 인식론적 반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반성은 사회현상과 역사현상 속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사회현상과 역사현상에서의 자유라는 것도 반성적인 이성 능력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로운 사람은 이성의 능력에 따라 ‘절대자유’를 획득한다고 했다.

헤겔의 절대자유에 위배되는 정치형태를 띄고 있는 프러시아는 ‘반’의 상태에 있는 것이 된다. ‘합’의 상태인, 즉 ‘절대자유’가 보장되는 ‘합’의 상태로인 민주국가로서 프러시아의 건설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프러시아 정부 입장에 ‘반’하는 것으로 정부는 이들 좌파의 성장을 철저하게 봉쇄해 버린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대한 논문을 써서 제출하지만 끝내 채택이 안 되었기 때문에 1841년 예나(jena) 대학에서 고대 에피쿠르스와 데모크리투스 원자론 비교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23에 박사가 된다.

이후 1842(24)년에는 콜롱(cologne)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문 편집장을 지내나 라인신문이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폐간 되며, 1843(25)년 제니와 프랑스 망명,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였으며, 1844~7까지 파리로 축출되고 브뤼셀로 옮겨 엥겔스(f. engels)를 사귀게 된다. ‘young marx’는 이렇게 헤겔 좌파에 서 있었다

 

맑스의 유물론

헤겔은 정반합의 관념론으로 대표되는 철학자이다. 그는 역사는 정반합으로 변증된다고 봤다.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유물론인 역사적 유물론을 제창하였다. 역사적 유물론의 기초는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이를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원저자는 포이에르 바하)과 과학적 유물론을 하나로 통합한 역사적 유물론(물질이 정신을 지배)이라는 최종 작품을 남겼다.

 
『공산당 선언 the communist manifesto』(1848년)

“이제껏 현존하는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민중을 선동했던 “세계의 노동자여 뭉쳐라!”로 부르주아를 타도하자!

 
서문(prologue)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은 공산주의이다. 그 사실로부터 다음 2가지 결론이 나온다. 유럽 국가들은 이미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유령이 정체에 관해 말할 시점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공산당선언』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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