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향상의 리얼리티와 모더니티의 공존
생활향상의 리얼리티와 모더니티의 공존
  • 안재동
  • 승인 2008.05.16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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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찬 시인의 제4시집 [침묵의 칼날] ◀
▲ 안재찬 시인     © 독서신문
중견시인 안재찬 씨의 네 번째 시집 『침묵의 칼날』(푸른사상 刊)이 출간됐다.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대뜸 적은 그의 일성이 우선 인상적이다.

“이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5년을 쥐락펴락―한눈팔지 않는 부국에의 길에 개혁의 칼날이 불을 뿜을 것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당당한 이 나라지만―지구상 유일한 반토막 나라로―마침표 없는 남과 북의 눈치놀음 여정에 가슴이 아리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세속을 지배하는 언어는 경제, 경제, 경제뿐이다. 봄, 여름 지나 인문학 조종이 들려올까 모로 눕는 밤 더해 간다. 인도 격언에 ‘시인과 스님이 살찌는 사회는 불행하다’란 말이 있다. 정말 배부른 시대에 시 같은 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까?”라고 한다.

‘죽느냐 사느냐’ 혹은 ‘꼭 있어야만 되느냐 없어도 무방하냐’…. 우리의 일상은 물론 동서고금의 인간사에 빈번히 대두되는 철학, ‘존재가치론’에 다름 아닐 수도 있지만,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번 반문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내심은 분명, 시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과 애정의 강한 역설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가난한 입술은 계절을 잃어버려 목마른, 영혼을 위해 돈 안 되는 시답잖은 노래로 한 시대를 울음 섞어 놀며 뒹굴며 가는 길 멈추지 않을 게다.”

제1부 <죽계구곡의 아침>에 이어 <견고한 도전>, <어릿광대>, <얼음꽃>, <반성문> 등 모두 71편의 시를 전체 5부로 대별 편성한 이 시집은 한편 한편이 책 표제시로 삼은 <침묵의 칼날>마냥 독자의 심장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 『침묵의 칼날』 표지     ©독서신문
목줄을 조여오는 위급한 시간에도 바다는 울지 않았다. 천하가 다 아는 살붙이의 목구녕이 한둘 아니란 것에도 바다는 울지 않았다. (중략) 기름칠 덕지덕지 모색暮色이 짙은 화상의 얼굴로도 좀체 흔들리지 않는 바다 자신을 찾은 문병객의 가슴 치는 금속성 곡소리가 난잡으로 성성해도 타오르는 분노를 오롯이 빈그릇에 담아 말없이 어루더듬어 주는 바다 애락의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수도자의 얼굴일 듯 소멸의 경계에 서 있는 생명들의 절규를 모아 모아 소성의 칼날을 벼리고 있는 바다 깊이 모를 그 바다의 어전語典에는 울음이란 말 없다

― <침묵의 칼날> 부분


이성교 시인(한국기독시인협회장·성신여대 명예교수)은 해설을 통해 “안재찬 시인은 체험을 시의 중요한 바탕삼아 남들이 감히 접할 수 없는 좋은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재찬 시인의 시는 체험 속에 핀 꽃이라 명명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인생체험을 혹독히 치루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안 시인의 시에 대해 ‘시의 특질인 이미지의 표출’, 즉 ‘한 주제를 향한 수법 형상화 솜씨’를 개성으로 꼽고 있다. 그 외에 ‘시 착상의 기상성’과 ‘시각적 효과의 오멀리즘 수법’, ‘자연탐구성’ 등도 안 시인의 주요 특질로 지목하면서 “안재찬의 제4시집 『침묵의 칼날』은 그의 독특한 세계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시단에서 크게 평가될 것”으로 예견한다.

아무도 걸음하지 않은 / 흐벅진 천진무구의 세계 / 흠뻑 눈동자에 넣다가 / 아름차다 발정나 순결 훔친 / 내 첫 발자국 / 목까지 차오르는 더운 숨결 / 한번 돌아서보니 / 단물 빠지어 생채기난 처녀성 언저리에 / 생경한 음계 분분하구나 / 경련 일으키며 모세혈관 흐르던 / 정복 또는 희열 / 어느새 부음도 없이 가버린 / 死語가 되었구나

― <첫 발자국> 전문

이유식 문학평론가(덕성여대 교수·청다한민족문학연구소장)는 이 시집의 총체적 이미지를 ‘생활향상의 리얼리티와 모더니티의 공존’으로 표징하고, “안 시인의 시에는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다룬 것과, 그렇게 하여 형성된 사회상을 읊은 것들이 있는데, 전자에서는 만남에서 순정과 진정이 작용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비교적 어두운 구석들이 짙게 깔려 부조리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자못 강한 것이 특색”이라고 설명한다. 그와 함께 ‘전통적인 시어(詩語)의 활용’, 시각적·입체적인 시행(詩行) 처리’, ‘풍자성을 띤 모더니티’ 등으로 시집의 특성을 요약한다. 이 평론가는 이어, “시집이 거듭될 때마다 독창적인 시상을 새로운 작시법의 시도로 발전시켜 온 시인은 이번 제4시집 『침묵의 칼날』에서, 현실적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리얼리티의 시와 자기 존재 확인을 위한 모더니티의 시를 아울러 창작해 보임으로써, 우리 시의 깊이와 넓이에 큰 획을 긋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결빙의 거리에 자지러진 / 비에 젖은 언어들, / 종교보다 한 수 위인 고봉밥 앞에 / 봉두난발 너부시 손 모두는 / 허발한 여명의 맥박에 / 비루悲淚가 흥건하다 // 침묵의 만리성 헐어 놓는 / 번지 잃은 낭인들, / 촌탁忖度하는 십자가 비껴가는 / 날갯짓 새인 양 푸드덕 / 부리에 해탈을 물고 / 동천冬天의 허공을 날으다

― <노숙인> 전문


안재찬 시인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마치고 크리스천문학과 시인정신 등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한국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이며 월간 문예사조 편집실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해동문학과 좋은문학의 편집위원, 강남예술아카데미 지도강사, 한국기독시인협회 홍보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1시집 『빛과 그림자』 등 3권의 시집이 있다.

 

▲ 안재동 시인/평론가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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