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영화, 소리의 예술’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전체로서의 영화에 대한 에세이며, 소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1장에서 다루겠지만, 소리의 문제는 영화예술 초창기부터 제기되었다. <14쪽>
최초의 영화들에서 움직임을 보인 것은 배우들의 활기 있는 동작만이 아니었다. 이 동작들 뒤에서 바다와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잎이 우거진 나뭇가지들, 곤충 한 마리의 비행도 움직임을 보였다. 바로 이것들 자체, 즉 자연의 자발적인 협력이 시네마토그라프 초기에 관객을 매혹시켰다. (…) 영상의 서열은 아직 없었다. 움직임의 민주주의였고, 여기서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영화였다. 잘 알려진 이 최초의 경이에, 훨씬 더 명백하면서 비밀스러운 또 다른 경이가 추가될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다는 점이다. <19쪽>
‘무성영화’를 지칭하려고 오래전에 내가 제안한, ‘듣지 못하는 영화’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즉 말과 소리는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듣지 못했다. <20쪽>
듣지 못하는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을 했고, 때로는 유성영화의 인물들보다 더 많이 말했다. 이때는 대화라는 활동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략 1910년과 1915년 사이에 나온 최초의 픽션 영화들을 본 몇몇 현대 관객에게, 몸짓을 크게 하는 특성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담화 내용을 코드화된 동작의 몸짓으로 옮긴다기보다는 말하는 몸 전체로 나타내는 것이다. 유성영화에서는 등 돌린 누군가를 보여줄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만 들려줘도 충분하지만 이렇게 되면 [관객이 듣는 목소리가] 내면의 목소리라는 의심이 생겨나 목소리로 ‘감각의 유령’을 만들어내게 된다. <22쪽>
영상과 소리가 동시에 나온다는 사실은, 심지어 그것이 하루에 수천 번 관찰한 현상이라 해도 애초에 전적으로 자명하지 않았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에 나오는 기병처럼, 청각적인 것은 언제나 시각적인 것에 뒤처진다. (…) 한편으로 청각적인 것은 대체로 원인이 아니라 효과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차이일지라도 뒤늦게 온다. 다른 한편, 전파가 느리기 때문이다. 즉 소리는 공기 중에서 1초에 340미터밖에 가지 못하고, 빛보다는 거의 백만 배 더 느리다! 따라서 소리와 영상이 명백히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 인간 지각의 어림셈에서 비롯되었을 뿐이고, 이런 어림셈이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의 기반이다. <71쪽>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는 처음부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현상의 동시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화에서는, 음향효과의 원리 자체가 그렇지만, 시각적인 움직임과 동시에 일어나는 소리가 영상에 자동으로 달라붙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71~72쪽>
가지각색의 사람들의 침묵(그것이 동물적 복종이나 순전한 타성이 아닐 때)만큼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거의 없다. 디지털 사운드 덕분에 실현된 압도적 침묵(물론 아무도 이런 귀결을 미리 계산하거나 고안하지 않았는데도)은, 영화관 상영에서 주의를 파고들고 문장과 단어 사이의 빈 공간을 파고들며, 사람들을 각자 자기 고유의 침묵과 자기 청취의 진실로 돌려보내고 이를 지속되게, 오랫동안 지속되게 할 수 있었다. <251쪽>
너무 깨끗한 유리로 만들어진 완벽한 수족관을 상상해보자. 이 수족관은 유색 액체로 채워져 있을 때만 테두리가 보일 것이다. 숏은 시공간을 담고 있는 수족관이다. 반면 몇몇 사람이 ‘사운드트랙bande-son’이란 말로 이론화하려 한 것은 테두리가 없고 따라서 일관성이 없다. 즉 어떤 영화의 소리는 미리 존재하는 사운드트랙에 들어 있지 않다. 어떤 영화의 순간에 한두 개의 소리가 동시에 들릴 때, 여기서 열 개나 열다섯 개의 소리도 들릴 수 있다. 소리에 소리의 프레임이 없는 것처럼, 소리의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347쪽>
어떤 영화 양식이 노화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스크린에 개봉될 때는 선명도 때문에 새로웠던 영상들이 때로 몇십 년 뒤에 좋든 싫든 더 제한되고 더 획일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705쪽>
예술을 통해 집요하게 이루어진 세계의 탈위계화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나 염세적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재발견하게 해주고, 모든 것이 흥미롭고 어떤 것에도 등급이 매겨지지 않았던 유년 시절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 운명의 주체가 되기 위한 움직임이다. <707쪽>
『영화, 소리의 예술』
미셸 시옹 지음 | 이윤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875쪽 | 44,000원
[정리=유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