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난 부드러운 가을에
유리와 같은 맑은 노란색 낯으로 도망가고 싶다
아침 여덟 시에 깨고
그늘과 같이 슬그머니 나가서
구름과 함께 하늘에 날아가고
끈임 없이 책을 읽고
시들은 꽃과 죽어가서,
미래에 백년 전에 재생하고……
흰 옷을 입으며
모두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잠깐 있고 싶다.
거기서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 들리고
‘아이고’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슬퍼하는 딱 그 순간에
악의 없는거짓말 한 딱 그 순간에
나쁜 예감 때문에 긴장돼서
몸이 움츠러지다
온마음으로 웃고
그러나 난 내 세상을
내 안에만 숨기겠다.
조용한 외로움 속에
모든 소원들을 석방하겠다.
-류드밀라 지니나-최, 「난 부드러운 가을에」
옛날이야기를 다 잊고 홀로 있는 사람들
무엇을 두고 한국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한국 사람으로, 한국 국적이며, 한글로 쓴 작품이라고 빡빡하게 생각하기 십상이죠. 그러면 일제 식민지 시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어떡하나요. 중국으로, 만주로, 러시아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더 멀리 남미로 쫓겨 갔던 사람들은 어쩌나요. 더욱 너무 먼 소련 변방으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상관없는 걸까요. 주류 역사는 하얗게 탈색된 기억입니다. 백일몽 같지요. 허무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악몽은 자꾸 반복돼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문학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 스스로 소극적 민족 문학에 갇히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 「난 부드러운 가을에」는 류드밀라-지니나-최의 작품입니다. 1984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고려인 3세라고 합니다. 이 시도 러시아어로 쓴 것을 공주대 허 알레시아 선생이 번역해 소개했습니다. 류드밀라 최가 비록 우리 후손이지만 국적도 다르고 우리말로 쓴 작품이 아니라 한국 문학 속에 품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찬찬히 읽어 보세요. “흰 옷을 입으며/모두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잠깐 있고 싶다.”고 말하지 않나요. 고려인들이 겪었던 온갖 고난과 상처와 서러움이 그의 몸속 깊이 새겨져 있지 않나요. 그들의 소원이 무언지 우리가 모르는가요. 꿈에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들의 무의식이 시인의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우리 것이 아니라 부정한다면 저들의 영혼은 어디가 쉴 수 있나요. 유대인들이 수천 년을 떠돌면서도 비록 말을 잃고 나라도 없지만 오랫동안 세계 곳곳에서 유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지요. 한국 문학은 한반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디아스포라입니다. 흩뿌려진 씨앗입니다. 류드밀라-지니나-최는 또 다른 시 「노스탈기야(НОСТАЛЬГИЯ)」에서 “옛날이야기를 다 잊었고/나의 정원도 홀로 있었다./때로는 천연색 영화와 같고/길고 고통스러운 꿈만 꾸곤 한다.”고 운을 띄웁니다. 조상의 이야기는 이제 망각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예 삭제할 수는 없습니다. ‘노스탈기야’는 고대 그리스어로 ‘귀국’을 의미하는 ‘Νόστος’와 ‘고통’을 의미하는 ‘άλγος’가 합쳐진 단어라 합니다. ‘향수, 고향의 그리움’을 의미합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