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던 시기 영국 상류층 자제인 에드윈은 캐나다의 작은 섬마을로 유배된다.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의 특권을 비꼰 뒤 가족에게서 내쳐졌기 때문이다. 이 무기력한 백수 상류층 자제는 섬마을의 나무 아래를 걸으면서 세상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는데...
……찰나의 어둠, 기이하고 갑작스러운 빛……. ……숲, 신선한 공기, 주변에서 솟아나는 나무들, 여름날로 이루어진 찰나의 환각…….
베스트셀러 작가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최근작이자, 버락 오바마가 추천한 소설 <고요의 바다에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책은 1912년을 시작으로, 2400년에 이르기까지 500년의 세월에 걸쳐 각자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을 따라간다.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시간대도 다른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시대에서 종말에 가까운 위기를 앞두고 있다는 것. 1912년의 에드윈은 1914년 세계 1차 대전을 겪을 운명이고, 2020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빈센트는 우리가 잘 알 듯 시간의 흐름 안에서 팬데믹을 맞이할 수밖에.
나머지 미래의 위기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2200년대의 미래, 문명의 종말을 주제로 소설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올리브는 북 투어를 돌던 중 새로운 팬데믹을 겪고, 이미 역사의 위기를 지난 뒤 태어난 2400년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는 임박한 위기를 그리면서도 스펙터클한 묘사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조용하게 다가오는 '종말'의 과정과 이를 견디는 감각과 불안, 혹은 다가올 위기를 모르는 인물들의 삶을 차분하게 묘사한다.
팬데믹은 전쟁처럼, 멀리서 들리던 대포 소리가 매일 점점 더 커지고 지평선 위의 폭탄의 섬광이 번쩍이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감염병은 본질적으로 돌이켜 볼 때나 다가온다. 감염병은 방향 감각을 잃게 한다. 감염병은 멀리 떨어져있다가 주변 사방에 있다. 중간 단계는 없는 것처럼. (...) 우리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나 비일관적으로 행동했다.
어떤 항성도 영원히 타오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부주의하게 언어를 사용했을 때 놓치게 되는 것은 세상이 결국은 문자 그대로 끝나고 말리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문명〉이 아니라 실제 행성이 사라진다.
맨델의 인터뷰에 따르면(wmagazine, 2022.04.05), 이 책이 본격적으로 쓰여진 건 코로나19가 도착한 직후인 2020년 3월이다. 그에 앞서 2019년 말, 그는 작가로서 자전적인 경험담을 쓰고 있었다(책 속 작가 올리브의 이야기는 맨델의 경험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펜데믹이 창작적으로 더 무모한 도전을 촉발시키면서 <고요의 바다에서>가 탄생했다. 책이 SF, 탐정 소설, 역사 소설, 순문학을 모두 품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독자는 먼 과거, 에드윈이 겪은 기이한 체험을 호기심과 함께 추적하며 책장을 넘겼다가, 각기 다른 시간대의 인물에 이끌리며 출렁거리는 인류의 시간에 올라탄다. 때문에 책을 다 덮고 나면 500년을 살고 나온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가는 개인으로서 마주한 세상의 위기를 넓은 시간 속에서 탐구해 보고 싶던 것은 아닐까. 이해하기 힘든 그 불안과 공포의 시간을.
소설의 배경이 되는 무대 역시 광활하다. 지구, 그리고 이주 식민지로 개척된 달이 소설의 주 무대로, 제목 속 '고요의 바다'도 달의 지명을 가리킨다. 이 거대한 시공간을 지나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인류의 문제를 우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주의 관점에서 아주 작은 지구, 그 지구 안에 먼지만 한 지분으로 생을 부유하는 인간.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앞에 무너질 것이 예고된 인간. 그럼에도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작가는 인물을 통해 관찰한다.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는 ‘엔데믹’이라는 모호한 명명 아래 더 이상 중요치 않은 문제가 된 듯하다.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팬데믹은 오고야 말 것이다. 굳이 미래로 갈 필요 없다. 인류는 언제나 전쟁, 불평등, 그리고 기후 위기라는 재난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떤 항성도 영원히 타오르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인류의 미래는 높은 확률로 '종말'이고, 생의 종착지 역시 '죽음'이다. "예고된 종말" 속, 그렇다면 이 세상은 무의미한 걸까. 역사, 현재, 미래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해 ‘관계’라는 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난 또 그렇게 할 거야.」 (…) 「망설이지도 않을 거야.」”. ‘자신의 종말’을 알고도 타인의 삶에 먼저 손 내미는 책 속 인물의 말처럼.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