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손에는 아직도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전봉건, 「장난」
[시민 시인의 얼굴] 손에는 아직도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전봉건, 「장난」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6.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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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나는 나물를 겨누어 본다

꼭대기의 잎사귀를 겨누어 본다

그리고 돌멩이를 겨누어 본다

그러다 싫어지면 쑥 총구를 높여서

개머리판에 빰을 부비면

하늘이 가늠쇠 구멍 속에 들어온다

M1 가늠쇠 구멍 속에 하늘이 벌어진다

M1 가늠쇠 구멍 속에 하늘이 작다

그 하늘 밑에 내가 있다

작은 하늘 밑에 내가 있다

나는 하늘을 본다

작은 하늘은 눈에 해롭다

가늠쇠 구멍이 흐려진다

나는 장난을 고만둔다

-전봉건, 「장난」

손에는 아직도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전투는 끝났다. 피로 물든 계곡에서, 주인을 잃은 말 한 마리가 달아난다.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새로운 날이 열리는 여명이다. 공허하고 비통하다. 죽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널브러져 있다. 무기들도, 그것을 휘둘렀던 사람들처럼 싸늘하게 놓여 있다. 깊은 고요가 흐른다. 죽음의 고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들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손에는 아직도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장면을 묘사한 『스파르타쿠스, 신화가 된 노예』( M.J.트로우, 진성록 옮김, 부글북스, 2007.)의 첫머리다. 책은 노예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사태는 한국전쟁 통에 휩쓸렸던 어느 시인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전봉건의 시에는 피, 총, 폐허, 포로, 6월, 철조망, 죽다, 쓰러지다, 넘다 등의 시어로 점철돼 있다. 이러한 말들은 그가 전쟁 노예로 전락했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다. 시 「장난」 속 병사처럼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지루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노예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발목에 채인 사슬을 보고도 무덤덤하다. 병사도 시인도 마찬가지다. 전봉건은 1951년 중동부 전선에서 파편에 맞아 오른손 검지에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대구, 마산의 육군병원을 거쳐 통영에서 제대한다. 이때 그의 형, 김종삼의 친구, 전봉래가 부산 스타다방에서 자살하고 만다. 전쟁은 전선에서도 후방에서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시는 전쟁 기계로 전락한 인간의 무감각을 드러낸다. 사람을 죽이는 총구 끝에서 하늘이 왜소하게 내려앉았다. 장난하듯.

한국전쟁 때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향한다. 전봉건은 종군 시인이 되어 전선을 헤맨다. 모두 갇힌 존재이며 노예일 따름이다. 이들이 자유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 이유이기도 하다. 스파르타쿠스는 맑스가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꼽은 존재다. 스스로 사슬을 끊고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아무리 두둔한다 해도 노예의 발상일 뿐이다. 자기 몸에 채인 쇠사슬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노예의 삶이다. 이제 그만 분단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이 장난 같은 전쟁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때만이 해방된 자유인이라고 시인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다. 손에 쥐어진 칼은 이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되어야 한다고.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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