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흔적
지울 수 없는 흔적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4.02.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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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참으로 답답했다. 핸드폰 액정이 반쯤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해서다. 곧이어 배경 화면이 검정색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지난해 12월 혹한이 기세를 떨치던 어느 날 모 문학단체 행사장에서 일이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불통이 되자 왠지 불안했다. 무엇보다 병세 짙은 친정 노모 때문이었다. 어머니 신변에 무슨 변괴라도 생기면 가족들이 연락할 수 없을 것 같아 더욱 노심초사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온 천지가 어둠의 장막에 휩싸이는 저녁이었다. 스마트폰 기기 서비스 센터를 찾기에도 어려운 상황인지라 이것을 손에 쥔 채 안절부절못하였다.

집으론 돌아온 다음 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핸드폰 서비스 센터다. 그곳에서 수십만 원의 수리비가 발생한다는 서비스 센터 기사 말에 새 핸드폰을 구입했다. 그 기쁨도 잠시, 그동안 핸드폰에 저장됐던 사진 및 수많은 주변 사람들 연락처를 전부 잃게 됐다. 스마트 폰 기기에 내장된 유심칩이나 컴퓨터로 자료를 옮기는 일에 소홀했던 탓이다.

카톡은 소통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전화번호는 일일이 주변 사람들에게 요청을 해야 했다. 그나마 컴퓨터 주소록에 3년 전 연락처가 남아있어서 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얻게 된 전화번호는 깡그리 소실 됐다. 무엇보다 찬비가 장마처럼 쏟아지던 지난해 가을,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청년의 소식을 잃게 돼 더욱 안타까웠다. ‘진즉에 만났더라면 이럴 경우 인연이 이어졌을 텐데’라는 아쉬움에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친정 노모 병세가 위중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 병원에서조차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 진단이었다. 서울 큰 병원까지 갔었으나 그곳 의사로부터도 역시 별다른 묘안을 얻지 못했다. 지난날 코로나19를 앓고 난 후 어머닌 폐섬유증이라는 병을 얻었다. 폐가 3분의 2정도 굳었다고 한다. 또한 폐암까지 의심되지만 고령이라서 더는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의학에서조차 치료할 방법이라곤 약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단다. 이런 진단 끝에 담당 의사는 이 약이 무척 독성이 강하여 젊은 사람도 복용을 꺼릴 정도란다. 이 약 복용 시 피부엔 햇빛 차단제를 발라야 하며 음식물을 먹을 때마다 토하기까지 한단다. 그러므로 이런 독성 약을 복용케 하지 말고 심신을 편안하게 모시는 길밖에 없다는 의사 처방에 따라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지난가을 그날도 음식마저 토하시는 어머니를 동네 병원엘 모시고 갔다. 어머니의 응급조치를 끝내고 병원 밖을 나설 무렵이다. 가을비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졌다. 콜택시를 불렀으나 좀체 그마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어머닌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든 듯 자꾸 건물 바닥에 주저앉으려 했다. 가까스로 어머니를 부축하며 병원 입구에서 애타게 택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젊은이 역시 비를 피하는 듯 우리 곁에서 마냥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우리 모녀를 향해 말을 걸어온다. “실례지만 어디 사시나요? 가까운데 사시면 할머니께서 몹시 힘들어하시는 듯한데 제 차로 댁까지 모셔다드릴까요?” 라는 말에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타인 일에 무관심하잖은가. 설령 노인분이 눈앞에 쓰러져 있어도 ‘나 몰라라’ 하는 세태 아니던가. 그럼에도 힘들어하는 어머니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젊은이는 자청하여 자신의 차를 태워준다고 했다. 이 말에 순간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인상마저 선하게 생겨 별 경계심 없이 어머니와 함께 그의 자동차에 올랐다.

당시 그 청년 호의 덕분에 병환으로 쇠약해진 어머니를 집 앞까지 편안히 모시고 올 수 있었다. 그는 차 안에서 연세 든 노인 분들을 뵈면 시골에 계신 자신의 할머니를 뵙는 듯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후일 그 청년에게 식사라도 대접해 주고 싶을 만큼 우리 모녀에게 베풀어준 친절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 핸드폰에 그의 전화번호를 저장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어머니 모시랴. 집안일에 쫓겨 미처 청년에게 그날 고마웠다고 문자만 보낸 후 두 번 다시 만남을 갖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핸드폰 고장으로 그 청년의 연락처를 잃고 나니 베풀어준 친절에 제대로 고마움을 갚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삶을 살며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사람은 두 부류라는 개인적 생각이다. 전자前者는 인간미가 풍부하여 감동을 안겨주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 후자後者는 자신의 잇속을 위해 표리부동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이 청년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요즘도 지난해 가을철 찬비가 쏟아지던 날, 병마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필자를 태워준 그 청년의 해맑은 모습과 아름다운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전화번호는 이제 핸드폰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영영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우리 모녀에게 베푼 훈훈한 인정만은 가슴 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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