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독서] ‘시대의 어른’ 이어령을 만든 건 ‘어린아이 독서법’
[리더의 독서] ‘시대의 어른’ 이어령을 만든 건 ‘어린아이 독서법’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3.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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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故 이어령 1주기 특별 추모 전시 ‘이어령의 서(序)’ [사진=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故 이어령 1주기 특별 추모 전시 ‘이어령의 서(序)’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인간으로 태어나 나이 듦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되는 일이지만, 먹고 살기만 해도 팍팍한 현실 속에 ‘꼰대’가 아닌 진정한 ‘어른’이 되는 일은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영면한 ‘시대의 어른’ 故 이어령(1933~2022)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각별하게 남아 있는 이유일 테다. 행정과 교육 현장에서, 방송과 지면을 통해서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했던 그는 방대한 지식을 가졌지만 뽐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물음표’를 던져 이를 ‘느낌표’ 같은 통찰로 만드는 작업을 반복했을 뿐이다.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굴렁쇠 소년’으로 대표되는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총괄 기획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도서관을 교육부에서 문화부로 이관하는 등 우리나라 문화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저항의 문학』,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 대표작을 포함해 단독 저서만 185권을 남겼다. ‘디지털 광풍’이 불어닥쳤던 2000년대 중반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융합한 ‘디지로그’라는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그가 생전에 만든 수많은 유무형의 창조물 중 ‘갓길’을 최고로 꼽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표준어가 된 ‘갓길’은 이어령이 문화부 장관 시절 강경하게 제안해 바꾼 말이다. 원래는 영어의 ‘Road Shoulder’(길어깨)를 일본에서 직역한 한자어를 그대로 가져온 ‘노견(路肩)’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단번에 그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눈앞의 경치를 볼 수 없다. 고장이 나야 갓길에 차를 세우고 멈춰 선다. 그래서 여러 가지 풍경과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창조란 잘 달리는 슈퍼카가 아니라 고장 난 구닥다리 차와도 같은 것이다. 남들이 정신없이 달릴 때 홀로 멈춰 선다. 그리고 비로소 본다. 느낀다. 생각한다. ‘갓길’ 역시 이런 생각의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그는 강연 등에서 스스로를 ‘갓길 장관’이라 소개했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장 난 구닥다리 차’ 같은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놀라운 생각의 씨앗들을 피워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만의 독특한 독서법이었다. 주석을 깨알같이 다는 일이 지루해 논문도 몇 편 쓰지 않았다는 이어령은 책을 읽을 때도 “모든 책을 의무적으로 서문부터 결론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자신도 “풀을 뜯어 먹는 소처럼,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자유롭게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뛰고, 반대로 재미있는 부분은 닳도록 읽었다는 것이다.

말년에 젊은 후배들과 나눈 대화를 담은 두 권의 책 『이어령, 80년 생각』(위즈덤하우스)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에서는 특유의 창조력의 원천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어린아이처럼 멈추지 않는 지적 호기심이 가장 귀한 자산이었다. 80세가 훌쩍 넘은 그에게 “방대한 독서와 사색이 여전한 창조적 상상력을 가능케 했을까”라고 묻자, “그런데 덮어놓고 천 권의 책을 읽는 사람과는 다르다. 산 전체를 뒤진다고 다이아몬드가 나오는가. 어디를 파야 광맥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며 “나의 창조적 상상력은 지적 호기심에서 나왔다”고 강조했다.

이를 길러 준 건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이었다. 돌잡이에서부터 책을 집었다는 그는 동화책을 읽을 나이에 대학생이었던 형이 놓고 간 한자투성이 세계문학 전집을 사전도 없이,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전후 문맥에 맞게 상상으로 빈칸을 채우며 읽었다. 이때 익힌 독서 방법이 추후 라틴어 고전과 같은 더 어려운 책을 읽을 때도 유용했다고 한다.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게 아니다”라며 “책 한 줄을 읽어도 뭐가 기고 뭐가 아니고를 제 머리로 판단하면서 살라”고 했던 이어령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꼼꼼히 생각하며 읽으라고’ 조언한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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