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진리
불변의 진리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2.12.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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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구수한 커피 향만 맡아도 기분이 좋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신 까닭이다. 이렇듯 커피를 기호 식품으로 여기기까진 숭늉 맛을 잊지 못해서인가 보다. 어린 날 가마솥 밑바닥에 콩과 잡곡이 버무려진 노릇노릇하게 눌어붙은 누룽지는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요즘 어느 달콤한 과자 맛이 이를 따르랴. 또한 그 시절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숭늉 맛은 구수함의 극치이기도 했다.

한국인에겐 고유의 음식을 선호하는 DNA가 있는 듯하다. 요즘 젊은이들도 숭늉 맛과 흡사한 구수한 향의 커피를 즐겨 마시잖는가. 또한 슈퍼마켓에선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누룽지도 포장해 판매하고 있다. 이로 보아 아무리 산해진미가 놓여 있어도 우리 고유의 음식은 여전히 우리 미각을 사로잡고 있다. 김치, 된장, 고추장 등이 이를 방증하잖은가.

어찌 음식뿐이랴. 우리 민족이 지닌 선한 심성 역시 아직도 가슴속에 내재되었다면 지나칠까. 연말연시만 돌아오면 얼굴 없는 익명의 천사가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수 년째 거금이 든 돈 봉투를 놓고 사라지는 게 그렇잖은가. 또한 이번 이태원 핼러윈 데이 참사 때 온 국민이 보여준 사망자에 대한 애도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일부러 부산서 급히 고속전철을 타고 조의를 표하러 온 젊은이를 비롯, 조문객을 위하여 흰 국화 수천 송이를 기부한 사람 등, 이태원 6호선 전철역 앞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애도 장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는 비통함에 젖은 우리네 가슴에 한껏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도 남음 있었다.

이렇듯 타인이 겪는 불행 앞에 함께 마음 아파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온정을 베푸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선한 민족임이 분명하다. 어디 이뿐이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겐 마음으로라도 보답해야 한다는 의식이 심리 저변엔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잖은가.

어린 시절 일이다. 적빈(赤貧) 속에서도 이웃이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정 많은 친구 어머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 애 어머니가 굽는 호떡을 사먹으러 종종 건너편 둑 위의 손수레에 차려진 호떡집을 자주 찾았다. 친구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생계가 어려워지자 손수레에 호떡 기계를 싣고 나섰다. 친구도 학교만 파하면 어머니 일을 도우러 나서곤 하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둑 위에서 그 애는 자신의 어머니와 언 발을 구르며 호떡을 구워 팔았다. 이때 건너편에도 역시 부부가 손수레 위에서 붕어빵을 구워 파는 게 보였다. 친구 말에 의하면 붕어빵 장수 내외는 자신의 어머니가 호떡 파는 일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고 했다. 붕어빵보다 호떡이 더 잘 팔리자 배를 앓았던 것이다.

어느 겨울날 혹한에 호떡을 구워 팔던 어머닌 그날따라 혼자서 국화빵을 굽던 맞은편 여인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를 자신의 경쟁 상대로 여겨 시샘하던 붕어빵 장수 내외였다. 언젠가는 친구 어머니가 잠시 자릴 비운 사이 호떡 반죽에 흙을 뿌리는 치졸함도 보인 그들이란다. 또 있다. 저녁나절 집에 돌아오며 피워놓은 연탄불 화덕에 물을 붓는 것을 이웃 노점상이 목격하기도 했단다. 이렇듯 온갖 심술과 해코지를 일삼던 붕어빵 장수 내외다. 하지만 친구 어머닌 호떡을 구워 팔다 말고 붕어빵 장수 여인이 갑자기 쓰러지자 그녀를 업고 한걸음에 내달려 인근 병원을 찾았단다. 급성 맹장이 터진 것이었다.

상대방은 그동안 친구 어머니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그 애 어머닌 어려운 일을 겪는 붕어빵 장수 여인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친구이어서인가. 훗날 친구는 독거노인을 돌보고 어려운 이웃을 위하는 일에 늘 소매를 걷곤 하였다.

요즘도 친구들 애경사는 물론, 집안에 힘든 일이 생기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와 힘을 보태는 그녀다. 평소 타인에게 받기 전에 먼저 베푸는 일에 익숙한 친구는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사업체를 일군 사장이 되었다. 이로 보아 세상이 점점 기계화되어 편리할수록 문명의 불빛이 아무리 휘황해도 가슴이 따뜻하고 이타심이 강한 사람이 성공하는 진리만은 변함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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