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설’은 없다… 세상으로 나온 장애인들
‘좋은 시설’은 없다… 세상으로 나온 장애인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5.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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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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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우리를 시설에 가두지 마십시오. 여기서 당신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2009년, 경기도 김포의 장애인 시설 향유의집(당시 이름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장애인 여덟 명이 시설에서 퇴소했다. 작은 장롱 두 개, 소형 냉장고 하나, 전자레인지 하나, 서랍장 하나, 옷가지와 이불, 자잘한 가재도구… 여덟 명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단출한 이삿짐과 함께. 대부분 20년 이상 시설에 거주했던 이들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위와 같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기한 없는 노숙 농성을 시작했다. 노숙을 할지언정 시설에서는 살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그로부터 두 해 전인 2007년, 이들 중 한 명인 한규선씨는 시설이 장애인 앞으로 나오는 수당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고발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시설의 각종 운영 비리와 인권유린 문제가 공론화됐다. 책임자들이 처벌받거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생활 여건은 훨씬 나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만족하지 않고 “좋은 시설은 없다”고 외치며 시설을 나왔다. 이후 다른 거주인들도 동참해, 지난해 향유의집은 장애인의 의지로 문을 닫은 최초의 장애인 시설이 되었다. 

그들은 왜 시설을 나왔을까? 시설 밖에 사는 사람들은 시설을 잘 알지 못한다. 중증 장애인은 가족과 분리되어 시설에 사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시설의 비리나 인권유린 문제는 잘못된 일이지만 사회복지 차원에서 시설은 꼭 필요한 곳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향유의집이 문을 닫기까지의 길고 험난했던 과정을 다룬 책 『집으로 가는, 길』에 따르면,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좁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거실도 없이 양쪽으로 방을 줄지어 놓은 곳이었다. 생활재활교사로 일했던 김만순씨는 이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러한 구조에 대해 “장애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니까 머릿수가 많아야 돈이 될 거잖아요”라고 설명했다. 시설에 거주했던 황인현씨는 시설이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시설에서의 하루는 “먹고, 목욕하고, 싸고 끝”이었다는 것이다. 시설에서 장애인은 그저 관리의 대상이었기에 직원의 일과에 생활 패턴을 맞추고, 졸려도 잠을 참으며 눈치를 봐야 했다. 직원들은 그들을 돌보는 일 외에도 여러 잡다한 업무를 봐야 해 최소한의 서비스만을 지원했다. 맞춤형 서비스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마로니에공원에서 벌어진 노숙 농성은 장애인이 시설 밖에서 살아간다는, 우리 사회가 상상해 본 적 없는 대안을 제시했다. 사실, 장애인이 시설에 살지 않을 권리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시설을 벗어나자는 ‘탈시설 운동’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장애인에게 기본적인 주거와 활동서비스 지원만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굳이 시설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무작정 시설을 나가면 이들이 더욱 방치되는 건 아닐까. 탈시설의 취지에는 공감하더라도 이런 우려가 들 수 있다. 장애인을 가까이에서 돌보던 시설 직원들도 그들이 자립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일했던 권영자씨는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과거 “자기표현이 가능한 분들만 나와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직접 그들의 자립생활을 돕는 활동지원사로 일하면서 그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시설에서 일괄 관리할 때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돌볼 수 있었으며, 기본적인 의사표현조차 어려운 중증의 인지장애인도 시설을 나와 1:1 케어를 받으니 사람이 훨씬 밝아지더라는 것이다. 

물론 시설을 나가는 것이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의 인프라가 아직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시설 안에서 하루하루 늙어 가고 있는 장애인들의 소중한 삶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 탈시설 운동에 동참한 활동가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장애인들은 이제 겨우 ‘시설사회(장애인들을 시설에 가두는 사회)’를 벗어나 ‘집으로 가는 길’의 출발점에 섰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다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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