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대신 ‘책’ 지어 주는 한의원
‘약’ 대신 ‘책’ 지어 주는 한의원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4.30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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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처방하는 한의사 이상우 씨 [사진=남해의봄날 출판사]

경주의 오래된 동네, 황오동에는 책을 처방하는 한의사가 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침을 놓고 약을 지어 주듯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는 책을 처방한다. 『마음병에는 책을 지어드려요』의 저자 이상우 씨다. 저자의 한의원은 동네 사랑방처럼 언제나 사람들의 사연으로 북적인다.

저자는 한의대에 가면 공자와 맹자를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속아 3수 끝에 한의대에 진학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만큼 엄청난 애서가로, 삶의 고비마다 책의 도움을 받았다. 책이 주는 치유를 직접 경험했기에 자신 있게 책을 처방한다.

위장병이나 퇴행성관절염이 심한 사례 중 화병을 동반하는 사례가 많다. 배우자와의 문제, 부모 자식과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신체의 병까지 만든 것이다. 저자는 화병과 같은 마음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환자에게는 『법륜스님의 행복』을 가장 많이 추천하고, 한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심리치유법을 담은 『마음세탁소』와 북드라망 출판사의 ‘낭송’ 시리즈도 자주 추천한다.

“병이 나서 못 살겠다”는 환자에게 무작정 지혜가 담긴 책을 들이민다고 그 내용이 환자에게 바로 가 닿는 건 아니다. 몸에 좋은 한약도 감초, 생강, 대추 등으로 쓴맛을 누그러뜨려야 삼킬 수 있듯, 좋은 말이라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마음에 들어간다. 그래서 저자는 환자들의 페이스메이커(마라톤에서 함께 달리며 페이스를 조절하도록 도와주는 사람)가 되기로 했다.

좋은 책을 읽는 일은 좋은 음식을 골라 먹는 것처럼 인생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힘겨운 사람이 지금 나에게 어떤 책이 필요하고 어떤 책이 나쁜지 스스로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마음이 병든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끌리는 책은 오히려 치료에 좋지 않다고 말한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듣기 좋은 소리보다 직언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환자의 상태를 상세히 살피고 그에 맞는 책을 고른다.

처음에는 단순히 책을 권하는 정도였지만, 환자들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처방 방식도 다양화했다. 환자들은 처방받은 책을 베껴 쓰거나 소리 내어 읽고, 마치 선생님께 숙제 검사를 맡듯 녹음 파일을 보내거나 필사 노트를 들고 한의원에 온다. 책이 버거운 환자는 책의 내용이 담긴 유튜브 채널을 보며 내용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치료받기도 한다. 저자는 한의사로서의 진료 이외에도 환자들의 독서 습관을 관리해 주는 일을 “차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의 운전 습관과 정비 습관까지 고치는 것”에 비유한다.

이상우 씨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환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남해의봄날 출판사]

책 처방은 놀라운 효과를 나타냈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고민하며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고 호소하던 한 환자는 법륜스님의 유튜브 채널 ‘즉문즉설’을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며 꾸준히 노력한 끝에 남편을 ‘배우자’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가르치려는 자세로 대하던 남편을 ‘배우자’는 자세로 대하니 갈등에 덜 휘말리게 되었고, 감정이 올라와도 그 감정에 휩싸이기보다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책 처방은 오래되어 굳어진 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 특효약이다. 그래서 저자는 다이어트 치료에도 책 처방을 사용한다. 운동을 권하며 가이드가 될 수 있는 책을 함께 추천하는 식이다. 운동을 전혀 해 본 적 없는 환자에게는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를, 체중 감량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아무튼, 피트니스』를 추천하고, 중년이거나 운동량을 늘릴 필요가 있는 환자에게는 『마녀 체력』을 권한다.

물론, 책 처방으로 모든 질병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환자가 많아 한 사람당 3분 정도밖에 할애하지 못하는 이 한의원이 인생까지 진찰하는 ‘동네 사랑방’이 될 수 있었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책이라는 매개체 덕분이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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