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에게 듣다] 윤가은 감독 “조금 이상한 것을 열렬하게 좋아했다”
[명사에게 듣다] 윤가은 감독 “조금 이상한 것을 열렬하게 좋아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2.03.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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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우리집> 등의 영화로 평단은 물론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영화감독 윤가은. 그가 최근에 ‘나를 웃게 했던 것들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책 『호호호』를 냈다. 제목과 부제 그대로 이 책에는 윤가은을 웃게 했던,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호호호’라는 말의 어감이 좋아 사전을 찾아봤다. 예문으로 나오는 문장을 보니 “꾀꼬리는 호호호 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며” “그녀가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호호호… 하고 웃음볼이 터졌다” 등이다.

‘호호호’에서 ‘호’를 하나만 빼면, ‘호호’다. 호호란 입을 오므려 내밀고 입김을 잇따라 내뿜는 소리를 말한다. 뜨거운 것을 식힐 때 혹은 상처가 난 자리에 연고를 바를 때, 엄마가 “호호” 해주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호호호’라는 웃음과 함께 ‘호호’라는 치유를 선물한다. 돌이켜보면 윤가은이 만들었던 영화도 그랬다.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영화 말고도 좋아하는 게 아주 많다는 그. 지난 2일 합정역 근처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윤가은을 만났다.

윤가은 감독 [사진=안경선 PD]

Q.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출간 제의는 5~6년 전에 왔다. 그때 <씨네21>에 연재하던 칼럼을 묶어서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 영화를 마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번아웃이 왔다.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다가 내 인생을 돌아보는 글쓰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편집자님에게 전달했다. 내가 어떤 것들을 좋아해오며 살았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그게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였다.”

Q. 글쓰기를 통해서 마음을 치유한 셈인가.

“그렇게 말하면 좀 거창하고. (웃음) 사실 영화를 너무 좋아했지만,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예전처럼 신나거나 즐겁지 않더라. 돌이켜보면 당시에 많이 지쳤던 거 같다. 삶에 어떤 활력이 필요했다. 내가 영화 말고 좋아하는 게 많으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보면 내가 좀 신나지 않을까 혹은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 책이다.”

Q. 시나리오와 책 작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시나리오는 영화 제작 과정의 한 단계이기 때문에 완성본이라는 게 없다. 촬영 중에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수정해가면서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있는 글이다. 하지만 책은 시나리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글쓰기니까. 내가 가는 길이 정말 길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굉장한 책임감 같은 걸 상대적으로 더 많이 느낀다. 단어 하나도 함부로 쓰면 안 되는구나, 하는 그럼 느낌이 들었다.”

Q. 책 작업의 경험이 영화를 만들 때 긍정적 효과를 주기도 할 것 같은데.

“책을 이경미 감독님에게 보내드렸다. 책을 받고는 딱 그렇게 말씀하셨다. 책을 쓰는 경험이 나중에 큰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거라고. 이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런 순간이 나에게 올지 모르겠다.”

Q. 모든 에세이가 그렇지만 당신의 취향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이건 굳이 적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대목도 있나.

“그런 건 이미 편집 단계에서 다… (웃음) 내가 지금 너무 많은 걸 적고 있나 싶을 땐 계속 편집자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Q. 책에 적힌 것처럼 아트영화를 즐겨 볼 것 같은데, 의외로 취향이 다양해서 놀랐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가감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취향을 드러낸다는 게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근데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물론 너무 과하게 드러내지 않아서 다행인 측면도 있다. (웃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여전히 ‘수집’까진 아니지만 ‘채집’ 정도로는 불릴 만한 나름의 취미 활동이 생기긴 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어릴 때 좋아했던 문구류나 장난감, 만화책 등 이른바 ‘고전 문구 완구’로 불리는 옛날 물건들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옛날이라고 해봤자 내가 어린이·청소년으로 자란 8~90년대에 만들어진 제품들이 대부분인데(옛날 맞음), 가끔은 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은 6~70년대의 물건들을 같이 살펴보는 정도였다(진짜 옛날 맞음). - 본문 中

Q. 괄호를 치고 설명하는 작법이 인상적이다. 영화로 치면 재기 발랄한 내레이션이라고나 할까.

“의식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영화로 보자면 내레이션일 수도 있고, 시나리오의 지문에 적혀 있는 행동이나 감정묘사일 수도 있다. 그냥 쭉 이어지는 글 말고 사이사이에 괄호를 쳐서 부연을 하면 그게 독특한 호흡을 만들어내서 웃음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Q. 본인을 청소 중독자로 규정한다. 청소는 ‘앎의 과정’이라고 까지 얘기한다. 왜 그렇게 청소에 몰두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청소를 좋아했다. 굳이 분석하자면 나에게 청소라는 행위는 불안할 때 나오는 강박적인 행동인 측면도 있다. 한편으로는 워밍업의 차원에서 청소를 하기도 한다. 특히 시나리오를 쓸 때는 일종의 대장정을 떠나야 하는데, 그때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청소를 한다. 청소를 통해 주변을 좀 깨끗하게 하면 흐트러진 머릿속의 생각들이 정리가 될 때가 있다. 사실 이건 다 변명이고 그냥 불안해서 하는 것 같다. (웃음)”

Q. “주로 어린 시절 보았던 그림책과 동화책, 만화책과 잡지, 백과사전, 도감, 도안집 같은 걸 틈날 때마다 부지런히 사 모으고 있다”고 적었다. 최근에 ‘득템’한 게 있나.

“절판된 책을 하나 구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라는 책이다. 그 안에 창작론에 대한 여러 가지 글이 있다. 이 책을 최근에 구해서 읽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책.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책. 온갖 매체를 뒤섞어 새로운 화법을 만들어내는 그 이상한 책들을 나는 참 열심히도 찾아다녔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나만의 고유한 언어를 만들어 가장 내밀한 무언가를 펼쳐 보이리라 꿈꾸고 기대했다. 그 이상한 책들의 이상한 페이지들을 넘길 때마다, 그때의 열정과 다짐과 계획들이 오롯이 떠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 본문 中

Q. 아트북에 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요샌 3D 입체북처럼 예술 작품에 가까운 그림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한권만 추천해 달라.

“앤 카슨의 『녹스』라는 책이다. 저자가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며 만든 책인데, 서로 연결된 내지가 아코디언처럼 쭉 펼쳐져 있다. 그 책은 정말이지 예술 작품인 것 같다. 책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Q. 어린 시절 읽었던 명랑만화들 덕분에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었다고 적었다. 왜 하필 명랑만화였나.

“아버지가 헌책방을 좋아하셨다. 헌책방에 갈 때마다 명랑만화를 몇 권씩 사오셨다. 명랑만화는 단순한 그림체 안에 나와 비슷한 또래들이 모험을 떠나거나 혹은 일상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다. 그게 나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런 책들을 그냥 가볍게 보지 않고 오랫동안 봤다. 어찌 보면 단순한 책을 깊게 받아들인 거다. 그러면서 어떤 나만의 세계관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었다.”

Q. 어떤 명랑만화들을 읽었나.

“길창덕 화백님 만화를 정말 좋아했다. 『꺼벙이』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다. 신문수 화백님의 『로봇 찌빠』도 즐겨 읽었다. 지금 읽으면 약간 촌스러운 감성도 있지만 그 감성이 주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사실 지금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웃음)”

Q. 명랑만화를 읽으며 쌓았던 마음의 양식이 주로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당신의 영화에도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둘 다 어린이들이 주인공이니까. 어린이로서 어린이 만화를 접할 때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어, 이런 생각을 그 만화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했을 수도 있다. 사실 정신력이 비슷해서 그렇다. (웃음)”

Q. 오랜 시간 걸으며 깨달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행복은 도착지에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있다는 진실이었다, 고 적었다.

“오랫동안 영화감독을 꿈꿨다. 영화감독이 되면 엄청난 행복이 물밀 듯 솟구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영화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좋기는 한데, 내가 꿈꾸던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일 뿐인 거다. 완벽한 행복을 바랐는데, 그런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되게 충격이었다. 그러다가 두 번째 영화를 한창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촬영장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인 거지 성공하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결국 과정 밖에 없구나. 과정을 행복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다음 영화에도 아이들이 나오는지.

“아직은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가 아닌데, 비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내 성격상 아이들이 또 나오지 않을까?”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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