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에도 역사가 있다
‘욕’에도 역사가 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2.03.07 0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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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이 없는 낱말은 없다. 말에도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국어학자 조항범은 책 『우리말 어원 사전』에서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말들의 역사를 담았다. 그가 이와 같은 작업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항범은 “우리말 어원 속에 녹아 있는 우리의 생활, 역사, 문화, 사유, 인식 등의 편린을 찾아내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그것이 어원 공부의 궁극적 도달점”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적은 말들의 역사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은 ‘욕’에 관한 부분이다. 바로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는 등신(等神)이다. 현재 등신은 몹시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지금의 뜻과는 달랐다. 한자를 풀이해보자. ‘等(등)’은 ‘같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등신은 직역하면 ‘신과 같음’이라는 뜻이다. 조항범은 “‘등신’은 처음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귀신’과 비슷한 뜻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등신이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능력자, 즉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 논거는 문익환의 책 『죽음을 살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광목이 처음 나타났을 때, 너무 넓어서 어머니가 이건 사람이 못 짜. 등신이 짜지라고 하시던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보듯 등신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초월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등신은 현재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이에 대해 조항범은 “아마도 ‘등신’이 나무, 돌, 흙 등으로 만들어진, 실체가 없는 사람의 형상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실체가 없는 우상(偶像)에는 감정이나 생각, 의지, 능력이 없다. 이는 사람으로 치면 ‘어리석은 사람’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다음은 염병(染病)이다. 무엇이 매우 못마땅할 때 하는 욕이 바로 염병이다. 한자의 의미를 그대로 풀이하면 염병은 ‘전염성이 있는 병’이다. 특히 염병은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쓰였다. 조항범은 “예전에 가장 흔하고 무서운 돌림병이 장티푸스였기 때문에 ‘돌림병’을 지시하는 ‘염병’이 그러한 특수한 의미를 덤으로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병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염병할 놈’이라는 욕이 만들어진 것이다.

근데 이 ‘염병할’은 상대를 비난하는 욕이 아니라 매우 못마땅한 상황을 한탄하는, 그러니까 넋두리 같은 욕에 더 가깝다. “염병할, 왜 이렇게 무거워!”에서 ‘염병할’이 사용된 맥락을 보면, 상대를 헐뜯기 위함이 아니라 상황 자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기능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염병할’은 ‘염병할 놈’에서 뒤따르는 ‘놈’이 생략돼 만들어진 욕이다. ‘오라질 놈’ ‘오사랄 놈’ ‘육시랄 놈’ 등도 마찬가지다. 조항범은 “특정 상대를 저주하는 욕에서 후행 요소 ‘놈’이 생략되면 특정 상황을 한탄하는 욕으로 기능이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말 욕의 생성도 규칙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규칙을 찾아내는 것도 우리말을 공부하는 작은 즐거움”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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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화 2022-03-08 09:10:27
박수를 보냅니다.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의 근원을 알게 해주시는 노력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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