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에게 듣다] 김초엽 “쉽게 희망과 연대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명사에게 듣다] 김초엽 “쉽게 희망과 연대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9.14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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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 [사진=안지섭 기자]

김초엽은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출간해 문단으로부터 한국 SF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인아영 평론가는 “김초엽의 SF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미래”라며 “동시대 현실에서는 아직 가능하지 않은 미래의 과학기술이 우리를 다채롭고 신비로운 세계로 데려간다”고 평했다.

김초엽은 ‘과학기술로 발전한 미래가 과연 더 좋은 세상일까?’라는 질문을 행간에 아로새기며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차별과 혐오 속에서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인 평론가는 “과학기술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알려주는 세상을 꿈꿔볼 수도 있다”며 “그 아름다운 모험의 길을 김초엽의 소설은 우리에게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멸망의 시대, 식물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와 그곳에서 개량된 더스트 저항종 식물들, 그 식물을 심으며 함께 살았고 그것을 전 세계로 퍼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식물학자라면 누구나 매료될 이야기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이야기였다.”

김초엽은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에서 ‘더스트’라는 독성 물질에 의해 멸망한 세계(dystopia)를 그렸다. 하지만 그 세계는 단순히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 암울한 미래상이 아니다. 김초엽은 어둠을 또렷하게 응시하면서 빛과 희망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멸망한 세계를 구한 천재적인 영웅들의 발자취가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자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는 기자에게 “나에게 좋은 사람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할 수 없는 세계이지만 다시 복원해야 하는 그런 모순적인 세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다채로운 욕망을 지닌 존재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소설에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복잡다단한 마음이 담겨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사옥에서 김초엽을 직접 만나 작품의 뒷이야기를 들어 봤다.

-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위로 선정됐다.

“내 이름이 좀 특이해서 선정되는 데 유리하지 않았을까. (웃음)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어떤 독자분들은 내 이름을 건 단행본뿐만 아니라 내가 필자로 참여한 문예지도 다 구매해서 보신다. 그런 걸 확인할 때마다 글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 쓰려고 노력한다.”

- 2019년에 발표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또 수록 작품 중에 「스펙트럼」은 <벌새>로 명성을 얻은 김보라 감독이 영화화를 준비 중이다.

“<벌새>를 시나리오로 먼저 읽었다. 시나리오만 읽었는데도 눈물이 났다. 개봉하면 무조건 영화관 가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봤을 때도 너무 좋았다. 근데 어느 날 김보라 감독님이 「스펙트럼」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소속사로부터 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소속사에게 ‘무조건 좋다. 이 계획을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웃음)”

- 첫 장편이다. 단편을 쓸 때와는 어떤 점이 달랐나.

“계속 쓰는데 안 끝나더라. (웃음) 내가 조금 집중력이 약한 편이다. 단편을 쓸 때도 구상은 길게 하지만 초고는 엄청 빨리 쓴다. 몇 주 구상하다가 초고는 대개 3일 만에 쓴다. 근데 장편은 그런 호흡으로 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장편의 경우엔 자료 조사를 많이 해야 하니까 그 핑계로 평소 가보고 싶었던 식물원도 많이 갔다. 또 긴 이야기를 쓰다 보니까 소재 고갈에 시달릴 염려가 없어서 좋았다. 단편은 항상 새로운 걸 생각해야 하는데, 장편은 중심 아이디어만 잡으면 되니까.”

- 전작이 큰 성공을 거둬 이번 작품을 쓸 때 부담이 많이 됐을 것 같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출간하고 1년 정도는 힘들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단편을 썼는데, 돌이켜보면 그때가 더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오히려 장편을 쓸 때는 이미 여러 마감을 거치면서 경험도 쌓였고, 부담보다는 무조건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썼다. 이번 소설은 정식 출간 전에 밀리의 서재를 통해 먼저 공개했는데, 연재를 하면서 ‘단편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독자분들이 좋은 점 위주로 많이 칭찬해 주셨다. 그때 ‘완벽한 작품을 쓸 필요는 없잖아?’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어떤 부분이 확실히 좋으면 좋은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사진=안지섭 기자]

- 이번 소설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파멸로 이끄는 ‘더스트’에 의해 멸망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소설 속 상황이 코로나19와 겹쳐 보인다.

“의도하고 쓴 건 아닌데 그렇게 읽으시는 분들이 많더라. 재난의 종류는 다르지만, 아무래도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이 행동이나 마음이라는 게 비슷하니까. 그래서 아마 지금의 상황과 겹쳐 읽을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반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태도가 소설 전반에 깔려 있다. 소설의 중요한 소재인 ‘더스트’와 ‘모스바나’도 그렇다. 더스트라는 폭풍에서 살아남으려면 모스바나라는 식물이 필요하지만, 모스바나는 또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식물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 혹은 세계를 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모습이 있지 않나. 가령 식물이 자연이고, 자연이 우리를 구한다는 통념. 그런 통념을 좀 비틀어보고 싶었다. 식물이라는 게 그렇게 안전하기만 한 건 아니고, 정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동적이고,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해칠 수도 있다는 그런 복잡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영웅적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하고 싶었다. 영웅이라고 할 만한 일들을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 그런 양면성과 다양성을 담고 싶었다.”

- 당신의 말처럼 대개의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재난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을 멋지게 해결하는 영웅이 등장한다. 근데 이 소설은 무수한 익명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해냄으로써 재난을 극복하는 서사를 보인다.

“대중문화 속에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세계를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과학자들이 많은데, 그런 재현 방식에 위화감을 느꼈다. 실제 과학이라는 게 인류를 이롭게만 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를 종식하기 위한 백신이 개발되고, 백신을 개발한 회사들이 대단한 일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진짜 영웅’인가 생각했을 때는 또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다. 또 연구라는 것은 한 명의 천재적인 과학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 작품을 쓸 때도 한 명의 과학자가 비현실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대학에서 화학을,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전공했다. 자전적인 경험이 많이 투영되어 있나.

“내가 연구실에서 느끼고 경험한 일들이 소설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약간 다른 얘긴데, 과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엄청 똑똑한 과학자들이 갑자기 뚝딱하고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과정이 아닌 결과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 혹은 과학이라는 복잡한 세계, 이런 걸 조금 실감 나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또 상상한 과학자들의 연구 방식이나 모습이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다.”

- ‘프림 빌리지’는 더스트로부터 안전한, 말하자면 유토피아적인 공간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지구 끝의 온실’이다. 이 공간을 왜 말레이시아 인근 지역으로 설정했나.

“이 이야기를 처음 구상할 때, 한 연구소가 열대우림 같은 곳에 둘러 싸여있고, 마을 사람들은 쉽게 접근할 수는 없는 그런 공간을 상상했다. 생각해 보니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레퍼런스를 찾아봤는데, 말레이시아에 ‘프림’이라는 곳이 있더라. 소설에 나오는 열대우림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숲 안에 연구소가 있고, 그 주위를 관광객들이 찾아올 수 있게 마을처럼 꾸며놓은 공간이었다.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다. 아예 없는 공간을 하는 것보다 실제로 있는 공간에서 따오면 좀 더 실감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는 말레이시아가 다국적 국가였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영어, 중국어, 인도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고, 여러 출생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한 군데에 모인 사람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운동성이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말레이시아가 지닌 다국적 국가의 특성들이 굉장히 적합한 것 같았다.”

- 소설이 마냥 희망찬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약속’ ‘우정’ ‘연대’ 등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디스토피아라고나 할까. 이 소설이 어떻게 보면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포착하고 싶었다. 가령 내가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또 변화를 위해 희생하지만 내가 그 변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인권 운동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또 과거의 아픈 역사를 목도할 때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무임승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때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

- ‘일’ ‘직업’ ‘노동’에 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말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신념이 위험할 때도 있다. 내가 만든 소설 속 인물들이 세계를 구해야겠다는 거창한 소명 의식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 나에겐 그게 더 중요했다. 살아가면서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인생이 가치 없는 인생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인생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 소설의 주인공 중 한명인 ‘아영’은 더스트생태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더스트생태학은 더스트로 멸망한 세계와 그것의 재건 과정을 포착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영’이 하는 일이 소설가의 일과 닮은 것 같다. 소설가 역시 내 주변에 무엇이 사라졌고, 또 무엇이 새롭게 등장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이 순수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과 소설에 대한 인식이 비슷한 것 같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인류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삼류 소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내면에 의미 있는 물결을 일으킬 수도 있는 거니까.”

- 불완전과 불가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과 가능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프림 빌리지’라는 공간이 어떻게 보면 유사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이 공간은 역설적으로 디스토피아가 있었기에 가능한 공간이다. 그런 걸 생각해 봐도 항상 좋은 것과 나쁜 것은 함께 온다. 어떤 것들은 좋고, 나쁘고를 구분할 수조차 없기도 하지만.”

- 소설은 돌고 돌아 결국 ‘공존’과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로 수렴하는 것 같다. 모스바나 역시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대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으니까.

“소설을 쓰면서 식물학과 관련한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건 식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주위 환경에 따라 자기의 모습을 바꾸고, 변화하고, 적응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모스바나라는 식물에 반영해보고 싶었다. 사실 공존과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는 너무 쉽다. 그런 결과론적인 말보다는 나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공존과 다양성으로 가는, 아주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 물고기가 아주 깨끗한 물에서만 살 수 없는 것처럼.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관계는 없다. 그런 관계성을 인정하고,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렇게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 소설의 마지막에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고 적었는데, 당신에게 그런 순간이 있나.

“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인물들처럼 극적으로 살지 않아서. (웃음)”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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