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⑦] ‘백마 탄 초인’은 온 걸까… 이육사의 『광야』
[문학기행 ⑦] ‘백마 탄 초인’은 온 걸까… 이육사의 『광야』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8.20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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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글을 읽고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 상상을 실제 상황과 맞춰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이지요. 저자가 처했던 상황, 시대 배경 등에 대한 이해는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됩니다. <독서신문>이 근현대 문학 배경지를 찾는 기행을 시작합니다.

■ 시리즈 기사 연재 순서
“누가 나라를 뺏기라고 했나”... 문학기행 ① – 조정래의 『아리랑』
“생명의 땅 평사리는 인간의 탐욕을 나무라지만”... 문학기행 ② – 박경리의 『토지』
“쓸모없어야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야 쓸모가 있다”… 문학기행 ③ – 조두진의 『북성로의 밤』
“절대 고독에서 만난 반가움과 사랑” 문학기행 ④ – 변경섭의 『자작나무 숲에 눈이 내린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문학기행 ⑤ – 심훈의 『상록수』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 문학기행 ⑥ –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

이육사문학관 정문 [사진=플랫컴]
이육사문학관 정문 [사진=플랫컴]

뜨거움이 한풀 꺾였다. 여름도 끝나가고 가을 문턱. 76년전 그 뜨거웠던 여름, 광복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 많은 문인들 가운데서도 육사가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의 기상이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인가.

수인번호 二六四(264). 본명 이원록. 우리는 그를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문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시어에는 희망과 미래를 기약하는 표현이 배어있지만 정작 본인이 살았던 환경은 엄혹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표현은 거침없다. ‘육시랄 놈의 역사’(戮史)를 필명으로 하려다 지인이 만류했다는 사례가 그의 성품을 말해준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 수준을 넘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시절, 육사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7일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그의 삶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대중교통으로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서울 청량리에서 2시간가량 소요되는 KTX를 타고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역에서 내려 택시를 골랐다. 버스는 대중교통 요금이면 갈 수 있지만 여러 번 갈아타야 하고 도착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휴대전화 지도 어플리케이션에서는 2시간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는 정류소 대기 시간을 포함하지 않은 시간이다). 편도 4만원. 1시간을 달려 문학관에 도착했다. 기사 민 아무개씨는 “공부 많이 하는 사람들이나 가지, 멀어서 지역 주민들도 잘 가지 않는 곳”이라고 귀뜸했다.

육사가 나고 자란 곳이며 이육사문학관이 위치한 곳의 지명은 ‘원촌리’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말을 매던 곳이라고 해서 ‘말맨데’라고 불리던 지명이 어느새 ‘먼먼데’로 바뀌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원촌’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속세에서 벗어나 청빈한 삶을 원했던 퇴계와 그의 후손들은 이곳 원촌리에 터를 잡아 살았다.

이육사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수 있는 문학관 복도 [사진=플랫컴]
이육사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수 있는 문학관 복도 [사진=플랫컴]

육사는 소위 ‘난 사람’이었다. 특히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다섯 살부터 조부인 이중직에게 소학을 배웠고, 일곱 살 무렵에는 한시(漢詩)를 외웠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일본 니혼(日本)대학전문부, 중국 중궈(中國) 대학 상과에 다니면서 동아시아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평범한 유학생처럼 보이던 그는 1927년 1월 ‘장진홍 의거’를 겪으면서 저항 의식을 본격적으로 표출했다. 독립운동가 장진홍(1895~1930)은 조선은행 대구 지점 등 경상도 내 일제의 주요 거점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은행 창문과 출입문이 부서지고 경찰과 은행원이 조금 다치는 데 그쳤다. 일제는 오사카로 몸을 피한 장진홍 대신 육사를 비롯한 청년들을 체포했다. 육사는 이 사건으로 1년 7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는데, 이때 받은 수인번호가 ‘264’였다. 1931년 대구격문사건으로 다시한번 수감생활을 하게 된 육사는 이때부터 자주 만주를 드나들었다.

이듬해인 1932년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해 군사간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의열단 간부학교’라고도 불린 이 학교에서 변장술과 사격술뿐 아니라 정치학과 철학 등 사상적인 교육까지 받았다. 의열단 단원이 된 이육사는 조선에 잠입해 작품 활동을 펼치면서 대중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일깨우는 데 노력했다. 소설, 수필, 사회평론뿐만 아니라 극본, 영화 평론까지 전 문학 분야에 걸친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

[사진=플랫컴]
이육사 관련 책들을 볼 수 있는 이육사서재 [사진=플랫컴]

조선인들의 저항 정신을 고취시키는 그의 노랫말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친다.

40년이라는 짧은 생이었지만 그는 17차례에 걸쳐 옥살이를 했다. 한번은 처남 안병철이 일제에 자수하고 조선혁명정치군사학교 단원들 명단을 넘긴 일이 있었다. 공식 문건에서는 ‘자수’로 나와 있지만 정황상 ‘자백’이 더 유력하다. 이때 육사는 장인에게 편지를 써서 처가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겠으며 자신의 처도 데려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육사문학관은 육사의 삶의 궤적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놓았다. 방문객들이 머물 수 있는 ‘생활관’, 실제 이육사 생가를 본따 만든 ‘육우당’, 육사 생가 터 등도 있다. 전시관 ‘정신관’은 2층 출입구로 들어갈 수 있다. 관람객들은 정신관에서 육사의 생애, 교육 환경, 변곡점이 된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 끝자락 카페 테라스에 서면 보이는 드넓은 전경은 또다른 스토리텔링 콘텐츠다. 왼쪽에 보이는 왕모산의 절벽은 육사의 시 「절정」의 시상지이다. 오른쪽 윷판데가 있는 산에서 아래를 내다보면 시 「광야」를 노래하는 시인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문학관 내 카페에서 내려다본 원촌마을 들판 [사진=플랫컴]

1층에는 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 활동 등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전화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면 육사가 국내 독립운동 당시 김원봉에게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오디오 콘텐츠, 「청포도」 「꽃」 등 육사의 주요 시를 음성으로 감상할 수 있는 스피커가 있어 관람객들의 생동감을 돕는다. 편지와 추모시 등도 있어 육사가 생전 어떤 인물들과 교류를 나눴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육사의 생만큼 이육사문학관도 운영 과정에 굴곡이 있었다. 2004년 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문학관은 초기부터 관리 운영에 난항을 겪었다. 2008년 안동시가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육사의 딸 이옥비(75)씨를 안동에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문학관 운영사업도 민간위탁으로 전환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위발 사무총장은 “코로나 유행 전 다른 문학관들이 1년간 1만~2만명 정도 방문했던 것에 반해 이육사 문학관은 10만명 정도 방문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육사 문학관의 주요 방문 대상은 문인 단체와 학생들이다. 현재는 방역지침에 따라 운영하지 않지만 문학관 내 생활관이 있어 단체 방문객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돕는다.

[사진=플랫컴]
이육사 생가를 본따 만든 육우당 [사진=플랫컴]

이육사문학관은 현재 『이육사 사전』 편찬과 이육사의 삶을 다룬 영화 제작을 준비 중이다. 사전은 육사에 대한 교과적인 지식 외에 사회적 맥락 등 총체적인 지식을 담을 예정이다. 영화 제작은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중단됐지만 조만간 촬영을 재개할 예정이다.

육사의 딸 이옥비 여사의 한자명은 ‘기름질 옥(沃)’과 ‘아닐 비(非)’이다. ‘기름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파란만장했던 실제 삶과 달리 그는 평범한 삶을 염원했다. 이 사무총장은 “육사는 딸의 이름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을 담았다”며 “시대적인 분위기가 육사의 성격을 그렇게 드러나게 했을 뿐 그 자신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방문하시는 분들도 그의 영웅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본 기획 취재는 국내 콘텐츠 발전을 위하여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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