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석한 사람은 많아도, 너그러운 사람은 적다”... 신유한의 『해유록』
“명석한 사람은 많아도, 너그러운 사람은 적다”... 신유한의 『해유록』
  • 황현탁
  • 승인 2021.06.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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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여행 ⑭]
[책으로 떠나는 여행] <독서신문>은 여행과 관광이 여의치 않은 코로나 시대에, 고전이나 여행기에서 기술된 풍광과 문화를 소개하는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칼럼을 연재합니다. 칼럼은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라는 여행기의 저자이며, 파키스탄, 미국, 일본, 영국에서 문화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한 황현탁씨가 맡습니다.
황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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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예술이라는 하늘에는 새 별들이 계속 나타난다"-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⑫ “평화와 재치, 정직은 절대 양보 못하는 가치”-마거릿 캐번디시의 『불타는 세계』
⑪ 명나라에 조선선비역량 뽐낸 조선관리... 최부의 『표해록』
⑩ “정의로운 것은 어디를 봐도 없다”... 린지의 『아르크투루스로의 여행』
⑨ “사랑을 위해서는 불속에도 뛰어들겠다” 아이헨도르프의 『어느 건달의 방랑기』
⑧ “기모노를 벗어던지고 칼을 들이밀며” - 카잔차키스 『일본중국기행』
⑦ “고종은 진보적이지만 나약하고, 민비는 지적이지만 후계 두려워해”
⑥ “조선 관리들, 중국 사대주의뿐 바깥 물정에는 관심 없어”
⑤ “사람을 파는 죄와 죽이는 죄는 다르지 않다” [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여행-혜초의 『왕오천축국전』]
④ 운명에는 겸손, 삶은 치열하게-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황현탁의 책으로 읽는 여행]
③ 속좁기로는 1등인 그리스 신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② 존 번연의 ‘꿈’속의 천국 여행 『천로역정』 
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숫자 12가 의미하는 것은 

『해유록』(海遊錄)은 조선 숙종 45년(1719년) 신유한(申維翰)이 4월 11일부터 이듬해 1월 24일까지 261일 동안(부산 출발은 6월20일, 도착은 이듬해 1월 6일) 제9차 조선통신사 일행(정사 호조 참의 홍치중 등 475명)으로 일본에 다녀올 때의 여정과 견문을 기록한 사행 일기(使行日記)이다. 제9차 통신사는 1718년 에도막부(江戶幕府) 제8대 쇼군(將軍)에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 吉宗)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파견되었는데, 신유한은 문필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으로 동행한다. 그는 일기체로 날씨, 항해나 통행, 풍광, 주요일정, 자신의 업무, 일본인과의 교유 등과 관련된 관찰, 문답, 감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부록으로는 일본의 지리, 풍습, 물산, 제도, 인성 등에 관해 듣고 본 것 23개 항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은 『문견잡록』(聞見雜錄)을 첨부하고 있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

그는 자신이 제술관이 된 것과 관련해 당초에는 꺼렸으나 도리없이 선발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높은 문화예술을 빛내는 것이 제술관에 달렸으니, 그 일이 번다하고 책임이 중대하여 사람마다 이 일을 마치 칼끝 피하고 화살 피하듯이 꺼린다. 어머니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재주가 둔하여 그 무거운 기대에 걸맞게 일을 수행할 수 없어,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아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사양하였다“고 썼다. 그러나 선발된 후 “조물주가 나를 희롱하여 과거에 뽑힌 뒤로 백가지 파란과 모욕과 고생을 갖추 겪었는데, 지금 또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득한 바닷길에 나세게 되었구나 싶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겪을 재난이 아직도 가시지 못한 탓이거늘 누구를 원망하랴”고 받아들인다.

곤륜학사 최창대는 “그대는 ‘작은 산에 송백이 없다’ 생각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곧 천 편 만수를 풍우처럼 빨리 써내어 제후들이 항우에게 굴복했던 것처럼 다 기가 질려 감동하게 해야지 한 사람(源與, 일본 명망문필가로 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 재임 시 관직)만을 굴복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하자, “내 얕은 재주로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몹시 부끄럽다”고 말한다.

축하 대상인 ‘관백’(關白)은 천황을 보좌하는 우두머리 신하로 막부정치가 시작되면서 천황은 형식상 통치자이고 실권은 관백인 쇼군이 행사하였다. 신유한은 요시무네를 ‘두뇌가 명석한(精悍俊晳) 위인’으로 기술하면서, “문장, 의장병배치, 음악 등은 고유한 것이므로 의미가 없다. 교린(交隣)은 성의가 귀중하니 기뻐하며 돌아가도록 번잡한 형식과 소소한 절차는 모두 없애라”는 지침을 내린다.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우선으로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며 부채를 감면해주고, 죽을죄를 지은 죄인은 코나 다리를 베는 형벌로 사형을 대신하게 하니 백성들이 칭송한다”는 세평을 기술한다. ‘사냥은 농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부하의 건의에 “안일하면 권태를 느끼고 술과 색을 가까이하게 되어 그렇게 했다면서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신하들이 사치하지 않도록 솔선수범한 그의 생활태도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신유한은 국서를 전달할 때 본 그를 “정력적이면서 모질고 단단해 보였으며 앉은 모양은 늘씬하고 얼굴은 누르스름하여 너그럽고 큰 맛은 없어 보였다. 전(殿) 안팎에 의장이나 호위병이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와 상황도 전한다.

사신 일행은 매월 1일과 15일 망궐례(望闕禮)를 올렸으며, 지진을 체험했다는 기록은 두 번 등장한다. 에도에서는 우뢰와 같은 지진으로 집이 흔들렸다고 한다.

신유한은 대마도에서부터 일본 측과 기 싸움을 하면서 조선 선비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그는 대마도주가 자신을 문회(文會)에 초대한 후 ‘도주에게 절하고 도주는 앉아서 절을 받는 것이 전례’라고 하자, “대마도는 조선의 한 고을에 불과하고 그는 지방관이므로 한자리에서 서로 존경하고, 내가 사신 다음 지위니 도주보다 조금 차이를 두면 된다. 손님과 주인이 동등한 것이 곤란하다면 마주 서서 나는 두 번 읍하고 도주는 한번 읍하면 된다. 임금이 보낸 사신을 도주가 홀대하는 것이다. 비록 칼을 뽑아, 내게 겨눈다 해도 예를 고치지 않는다면 도주를 보지 않겠다. 굽실굽실 절하고 시와 글을 짓는 것은 내 뱃속에 든 시문이 백금 한 꾸러미에 팔리는 것이 된다”고 주장하며 만나지 않고 시문도 주지 않았으며, 관아 구경만 하고 돌아온다.(보고를 받은 도주는 사신일행이 펼치는 마상재(馬上才) 관람)

돌베개에서 출간한 『해유록』
보리에서 출간한 『해유록』

그는 사신 의전편람을 확인한 후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여 도주의 제술관 비공식 초청과 상급 지급제도는 폐지하기로 한 후 공식행사에 참석한다, 종전대로 주던 선물도 이유 없이 받을 수 없다고 물리자, 안내원들이 앙심을 품어 따로 주는 것이 없자 가소롭다고 생각한다.

교토에서 그는 “일곱 자도 못 되는 단신으로 밤에 왜성 깊이 들어오며 삼엄하게 벌여 세운 왜인들의 칼끝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고 마음이 든든하니 우리나라의 국위를 믿음이다”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제술관은 양국간의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위험한 바닷길인 대마도의 악포(鰐浦)에서 1703년 역관 한천석이 빠져 죽었다, 후쿠오까 ‘하카다’는 신라충신 박제상이 의롭게 죽은 곳, 정몽주가 고려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된 곳(신숙주가 사신으로 왔을 때 ‘패가대’(覇家臺)로 표기하여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州)가 시에서 그렇게 표기), 지시마(地島)를 지나 종옥(鐘屋)은 임진왜란 때 왜선이 조선종을 싣고 오다 바다에 빠져 토요토미가 붙인 이름이며, 1655년 사신 남용익도 시에서 인용, 임진년에 우리나라 진주 사람을 포로로 잡아다가 살도록 한 진주도(晉州島)가 있다, 신라사람 일라(日羅)가 교토에서 죽어 신령이 있다 하여 사당을 왜경의 진산인 애탕산(愛宕山)에 세웠다는 사실 등을 꿰고, 대화나 기록에 임하고 있다.

그는 왜인들이 ‘언문’ 글자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여 써 보였더니, 언제 창제하였냐고 물어, “세종대왕께서 300년 전 과학에 근거를 두고 천하 만물의 음을 표현할 수 있게 하였다”고 답하여, 비록 ‘언문’이지만 왜인들에게 한글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설파하여, 사관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귀국길에 교토 대불사(大佛寺)에서 대마도주가 사신에게 쇼군의 명으로 연회를 베풀 예정이니 참석해달라고 요청하자, “도요토미의 원당(願堂)으로, 그 도적놈은 백년 가도 잊을 수 없는 원수로 불공대천의 의분을 금치 못하므로 갈 수 없다”고 하자, 절 가까이 장막을 치고 접대하기로 타협한다. 그 소식을 들은 황실 대신이 재고를 요청하였으나, 사신은 ‘쇼군이 들어도 마찬가지며, 10년 동안 머물러도 굽힐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대불사가 쇼군 이에미츠(家光) 시대 중건되었다는 비사(祕史)가 기록된 『일본연대기』를 보여주면서, 이에미츠는 토요토미와 사이가 나빴고, 토요토미 후손도 없으니 원당이란 말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설득한다. 사절단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었다는 판단에서 정사와 부사는 참석하고, 종사관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다. 이때 성질 사나운 아메노모리는 일본을 깔보는 것이라 하자, 신유한은 그 문제는 역관이 할 일이 아니라고 달랜다.

돌베개에서 출간한 『해유록』

그의 본래 임무인 시문교류와 관련, 남도(藍島)부터 시를 빌러 오는 왜인들 때문에 연일 시달려 우울하다면서(시를 얻으러 온 왜인들이 담을 이루었다), 그들의 시문을 보고 가끔 ‘표현이 점잖다’, ‘이백의 시를 인용하여 매우 재치가 있었다’ ‘문장 수준이 상당히 높아 왜인 중 으뜸’(三宅緝明)이라는 평도 하였으나, 시가 졸렬하고 거칠어 가소로웠다, 되잖은 소리가 많았다, 시가 많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없다, 보기에 한심한 것도 많으며 시는 졸렬하여 보잘것없다, 하도 보잘것없어서 웃음이 터져 먹던 밥을 상에 가득 뱉어낼 지경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중국 남경에서 배웠다는 사람이 이상한 글씨와 글을 평해 달라고 하자, ‘넓은 바다귀신 식견으로 하천 귀신에게 묻지 말아 주세요. 허나 참된 문장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천하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한방 먹이기도 한다, ‘산천과 누각의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답건만 왜 법과 시문을 졸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풍경을 그려보지 못하여’ 한스럽다고 밝히면서, 잠이 부족해 가마 안에서 잤다고 한다.

또 1711년 통신사 종사관이던 이방언이 제목을 써준 조산석보의 『지헌집』(芝軒集)의 서문을 써 달라고 하여 가는 길에 주었더니, 책을 만들어 천황이 보았다면서 귀국길에 감사연회를 베풀어주었다든가,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등은 나라의 기밀이 수록되어 공개할 수 없는 것인데도, 역관들이 사사로이 매매하여 출판까지 된 것을 보고는 통탄스러워 한다.

일본 사람들의 성정과 관련하여서는, 성질이 경박하고 사나워 무슨 일이 있을 적마다 곧 놀라 떠든다(대마도 사스우라항), 앉은 사람들은 반듯이 꿇어앉았고 선 사람들은 반듯이 손을 모으고 서 있어 감히 떠들거나 예의 없어 보이거나 길을 질러 나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대마도 구경꾼들), 습속은 거짓과 속이기를 좋아하여 털끝만치라도 이익이 있다면 죽을 데라도 달려간다, 백성 중에서 가난하여 장사를 할 수 없는 자는 고용살이를 하거나 걸인이 되거나 처자를 팔아서 살아간다(대마도 주민), 일본 풍속은 남을 이기기 좋아하니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전투를 할 때는 어떻겠느냐(놀이 배를 누가 빨리 대느냐 시합하는 것을 보고), 오사카 서점들에서는 고금의 제자백가들의 문헌을 마련해두고 출판하여 팔고 있었으며, 중국 서적과 우리나라 현인들의 문집들도 다 갖추어져 있다, 창녀와 기생이 있는 거리가 십리에 이르고 비단으로 꾸몄으며, 하룻밤 화대가 백금짜리도 있다든가 풍속이 음란을 좋아하고 사치를 숭상하여 여염집 남녀들도 비단 옷을 입었다, 술파는 여자들은 반드시 분을 바르고 옷을 깔끔하게 입었으며 소반과 그릇들도 깨끗하고 새것이다, 왜의 풍속이 그릇이 더러워도 먹지 않고 주인의 얼굴이 못생겨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주점에 미인이 많다(이상 오사카, 교토 풍광),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고 벼슬이 세습되어 인재가 한을 품거나 처지를 한탄하는 사람이 많음도 기술하고 있다.

가장 많이 상대한 역관으로, 1711년 통신사 방일에도 동행 안내한 대마도 기실(記室, 書記官) 중 한사람인 아메노모리 호슈(52세)에 대해서는, ‘말이 무거워 속을 드러내지 않으니 시인 묵객의 소탈하고 명랑한 맛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거나, ‘음험하여 겉으로는 말로 꾸미고 안으로는 칼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라의 요직에 권세를 잡는다면 반드시 이웃나라에까지 일을 낼 작자’라고 하면서 ‘이별자리에서 눈물을 떨구는 것은 제 설움일 따름’이라고 평한다.

여행일정이나 풍습과 관련해서는 “일본에 금법이 있어 외국인은 아무 데나 다니며 마음대로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대마도 역관), 국기일(國忌日)에는 다닐 수 없어 도주와 장로는 전날 밤에 배를 탔다(可笑롭다), 영남사람인 우리 뱃사공 소리가 느려 용맹을 돋우는 맛이 없어 왜 통역이 웃으면서 북쪽 손님 소리는 왜 그리 느린가 하고 질문, 세 사신의 배가 화포와 불화살로 서로 응하여 포성이 바다를 흔들고 화살이 불을 달고 나가는 모습이 별이 장가가듯, 무지개를 꽂듯 높이 솟았다가 천천히 구름 어린 바다에 떨어진다(藍島, 현재의 相島 체류 중), 항해 뒤 큰 비바람을 세 번 맞았는데 모두 육지에 올랐을 때로 왕의 덕화 덕분, 산기슭에 대포 수십 문을 설치하고 정자 아래 큰 전함 세척을 배치하여 기름먹인 덮개로 덮는 등 유사시를 대비한 무장 태세가 밤낮으로 빈틈없다고 정세를 개관한다.

또 교토에서는 “동사(東寺)를 지나서는 금빛 은빛으로 휘황한 층루 보각이 즐비하게 있으므로 이를 보는 나는 정신이 피로하고 눈이 어지러워 마을을 몇 곳이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달빛과 등불 빛이 위아래서 끝없이 밝아 밤길 수 십리에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되니 황홀하게도 전설에서나 들을 수 있는 봉래산 신선들의 궁궐을 보는 듯하다”거나, “한 송이 우뚝한 백옥잠 머리 같은 것이 새파란 하늘을 찌르고 섰다. 허리 아래로는 구름과 놀이 둘려 있으니 백련화 한 포기가 구름 밖에 나타난 듯하여 세상에서 늘 보던 것이 아니었다.”(후지산을 보고), 일본의 각 번(藩) 중 쇼군 일족이 다이묘로 있는 종신(宗臣, 御三家, 와카야마, 미토, 나고야)들이 병약함에도 ‘부강하고 오래 안락을 누린다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富强長久之樂, 實未可知也)이라고 쓰고 있다. 대마도주 등 동행 안내요원이 사절단의 곱절이 되어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고 부담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에도에 있는 대마도주 집 연회에서 일본의 창기집 풍경을 묘사한 춤을 보는 도중 조선에도 있는지, 학사도 저런 흥취를 아는지 묻자, “복색은 달라도 있소, 세상에는 쇠나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 없거든 나라고 왜 모르겠소. 삼갈 뿐이오”라고 답한다.

사신이 인삼을 밖에 나가 파는 것을 금하고 있음에도, 수색 결과 역관 권홍식에게서 인삼 열두 근과 은자 2150냥, 황금 24냥, 오만창에게서 인삼 한 근이 나오자 목에 칼을 채우고 대마도에 가서 처단키로 했는데, 권홍식은 대마도에서 음독자살했다든가, 정사의 본댁 편지가 28일 만에 한양에서 에도에 도착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일본의 지리나 형세 때문에 민첩하고 명석한 사람은 많아도 순박하고 너그러운 사람은 적다, 일본 옷에는 섶이 없고 바지와 잠방이가 없으니 그냥 앉으면 음양을 감추기 어려워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왜인은 걸핏하면 치고 찌르기 좋아하여 군장(君長)된 자가 늘 무슨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걷기 불편하고 몸 놀리기 어렵게 하여 좌석에서 불의의 일을 저지르지 못 하게 한다, 군인은 용감하고 총과 검은 우수하다, 사회적 신분은 병, 농, 공, 상 네 계층 순이며, 다음이 의학, 승도이고, 유학자는 끄트머리다, 우리나라 서적이 100종, 중국 서적이 1000종이 간행되고 있으며, 과거제도에서 오는 표절 해악이 없어 공부가 성실하고 연구가 심오하다, 여자가 남자보다 많으며 사촌끼리도 혼인하고 과부가 되면 형수와 제수와도 함께 산다,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하며, 남색이 여색보다 몇 곱절 성행한다, 아메노모리는 ‘일본 언급 시 왜적이니 오랑캐니 하여 모욕과 멸시 언사가 나오니 한을 품는다. 일본(사람)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영토가 통일되어 백성들의 생활과 나라살림의 충실함이 근세 이래 전성기다.”라는 내용 등이 기술되어 있다.

내가 읽은 『해유록』은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펴낸 것을 국내에서 출판한 것이어서 ‘구멍이 어웅하여(뻥 뚫려)’ ‘매우 들레며(서둘며)’ ‘안해(아내)와 같이’ ‘느꺼워(여념이 없어)’ ‘회포를 석삭이면서(속삭이면서)’ ‘성가퀴(성벽)’ 등 익숙하지 않는 북한식 표현이 등장하여 의미를 파악하려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 1607년부터 모두 12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나는 조선통신사 방일 400주년 기념으로 시행된 ‘통신사행로 걷기대회’가 열렸던 2007년에 도쿄 한국대사관에 공사로 근무하여, 한국에서 출발한 일행들을 도쿄의 히비야공원에서 영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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