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②] 박경리의 『토지』, “생명의 땅 평사리는 인간의 탐욕을 나무라지만”
[문학기행 ②] 박경리의 『토지』, “생명의 땅 평사리는 인간의 탐욕을 나무라지만”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5.1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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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글을 읽고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 상상을 실제 상황과 맞춰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이지요. 저자가 처했던 상황, 시대 배경 등에 대한 이해는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됩니다. <독서신문>이 근현대 문학 배경지를 찾는 기행을 시작합니다.

■ 시리즈 기사 연재 순서
“누가 나라를 뺏기라고 했나”... 문학기행 ① - 조정래의 『아리랑』
“쓸모없어야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야 쓸모가 있다”… 문학기행 ③ - 조두진의 『북성로의 밤』
“절대 고독에서 만난 반가움과 사랑”... 문학기행 ④ - 변경섭의 『자작나무 숲에 눈이 내린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문학기행 ⑤ - 심훈의 『상록수』

최참판댁 마당에서 바라본 악양면 들판 전경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섬진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드넓은 들판이 보인다. 故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이다. 들판을 등지고 산길로 ‘최참판댁’이라고 쓰여진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아기자기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다. 다른 갈림길에는 기와집 한 채가 놓여있다. 마당에서 보이는 산 아래 풍경이 아름답다. 평사리 들판을 전부 안은 듯하다.

하동은 『토지』의 초반부와 종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무대다. 전체 공간적 배경 중 약 30% 정도를 차지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 공간이다. 외세가 조선을 향해 본격적으로 손을 뻗던 시절, 작중 인물들은 83만평에 달하는 평사리 들판을 놓고 뺏고, 뺏기는 혈투를 벌인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자손 최서희가 친일파 조준구에게 대대손손 내려온 이 땅을 빼앗기면서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된다.

서울에서 최참판댁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서울역에서 구례구역까지 KTX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구례구역에서 다시 화개장터까지 버스로 1시간, 그 화개장터에서 다시 버스로 15분을 달려야 최참판댁 정류장이 나온다. 최참판댁은 악양면 들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 너머에는 섬진강과 악양천이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이다.

흔히 관광객들은 이 최참판댁을 실제 모델인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현장의 최참판댁은 2001년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과거 평사리를 찾은 관광객들이 특별한 시설물이 없는 것에 실망하자 하동군에서 최참판댁을 만들었다. 작가는 생전에 “『토지』를 갖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토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경계심을 보였지만 완공된 최참판댁을 보고는 “내가 생각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해당 구역은 소설 『토지』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살던 곳을 재현해 놓았다. 읍내 장터, 용이네와 강청댁, 물레방아 등 『토지』에 등장하는 시설들이 모여있다. 최참판댁은 한옥 14동으로 구현됐으며 남자 종들이 묵는 행랑채, 최치수 같은 가장이 기거하는 사랑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는 안채, 딸이 신부수업을 위해 묵는 별당을 갖추고 있다.

최참판댁 사랑채

대문에 들어서면 오른켠에 사랑채가 보인다. 2칸짜리 목조 건물에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마루가 합쳐져 있다. 몸이 아픈 최치수가 방 안에서 기침을 하면서 금방이라도 방문을 벌컥 열고 어서 물을 들여오라고 성화를 낼 듯하다. 사랑채에는 대청마루가 연결돼있는데 마루에 올라서면 악양면 들판 전경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온 관광객 최정자(62)‧현자(54) 자매는 “한옥 명소를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여기가 최고이다. 경치가 일품이다”고 말했다.

별당채 연못은 주인공들의 심란한 마음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소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별당아씨를 향한 구천이의 연모, 이런 구천이에 대한 별당아씨의 두려움과 설렘을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인물들은 이 연못에 얼굴을 비추고 자신의 감정이 더욱 솔직해지는 것을 체감한다. 어린 서희는 이 연못에서 떠나간 생모 별당아씨를 그리워하기도, 봉순이와 연못 속 붕어를 보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뒤꼍에 있는 사당도 빼놓을 수 없다. ‘사르르’ 대나무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도시민의 가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최참판댁을 벗어나 위로 올라가면 박경리 문학관을 만난다. 1층 규모의 목축 기와집이다. 입구 근처에는 생전 작가의 모습을 본따 만든 금색 동상이 있다. 최참판댁이 『토지』를 재현한 곳이라면, 박경리 문학관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가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작가 박경리에 대해 공부해볼 수 있다. 여러 신문사가 작가를 인터뷰했는데, 그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 지면이 중앙에 전시돼있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부로 끝내려고 했던 소설을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작가세계>와의 인터뷰에서 “삶이 지속되는 한 『토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경외감이 든다.

박경리 작가 동상(우)과 박경리문학관

재봉틀, 원피스, 만년필 등 작가가 평소 사용하거나 아끼던 물품도 볼 수 있다. 벽에는 작가의 초상화와 『토지』 주요 인물 그림과 인물 관계도가 눈에 띈다. 소설에 대한 줄거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배경지식 만큼은 얻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는 평소 평사리를 ‘생명의 땅’이라고 불렀다. 그의 생명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본전론’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물이나 나무 같이 자연이 주는 산물로만 살아가야지 삼림파괴나 농약 살포로 땅 그 자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욕심이 과한 나머지 땅 자체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탐욕을 지극히도 경계한 작가였다. 하아무 박경리문학관 사무국장은 “낡은 이야기 같지만 이 시대에도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를 제공한다”며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을 읽어보면 요즘 시대에 맞닿는 지점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본전을 탐한 욕망의 결과가 아니겠나”라고 반문했다.

평사리에는 매년 5월이면 박경리문학관 앞에서 추모문학제가 열린다. 10월에는 토지문학제가 최참판댁 앞에서 진행된다. 지난 5일 열린 추모문학제에서 참석자들은 『토지』에 담긴 작가의 생명사상을 되짚었다. 당시 최영욱 시인은 ‘산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연민이더라’라는 글을 통해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삶의 터전으로서의 토지를 제시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토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라며 “책은 뭇 생명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 땅 위에는 ‘염치’없는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의 생명사상의 정신은 이곳 평사리에서 후대 문인들에 의해 계속 전승되고 있다.

작가는 후일 최참판댁이 관광자원화된 것을 놓고 “내 소설 때문에 지리산 삼림이 파괴됐다”며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라고 아쉬워했다. 최참판댁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지리산 자락의 모양이 변한 것에 대한 우려였다. 고 박완서 작가는 박 작가 타계 이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이런 말을 남겼다.

“평사리를 지나는 길손들아, 걸음을 멈추어라. 그리하여 당일치기 관광객이 되지 말고 백년의 세월을 소요하는 나그네가 되어보지 않겠는가.”

본 기획 취재는 국내 콘텐츠 발전을 위하여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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