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곁에 있나요?” 영화 ‘애플’
[송석주의 영화롭게]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곁에 있나요?” 영화 ‘애플’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5.16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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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플> 스틸컷 [사진=(주)모쿠슈라픽쳐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쿵쿵”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맞춰 공간이 변합니다. 오프닝 타이틀이 사라지고 나면, 한 남자가 벽에 머리를 찧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의해 포착됩니다. 바로 영화의(“쿵쿵” 소리의) 주인공인 ‘알리스’예요. 이후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이 상황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면, ‘공간’과 ‘기억’ 그리고 ‘찧는다’라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영화 <애플>은 ‘공간과 기억을 찧는 영화’입니다.

알리스는 원인 불명의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기억상실증은 일종의 ‘유행병’으로 보여요. 알리스 말고도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 병을 앓고 있거든요. 버스에서 잠든 알리스는 종착역까지 가게 되고, “어디서 내리려고 했어요?”라는 버스 기사의 말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그리고는 구급차에 실려 가요. 병원에서 알리스는 가족이 없는 신원 미상의 환자로 분류되고, 의사들은 알리스에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제안합니다.

카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알리스의 일상을 4:3의 화면비로 담아냅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이 프레임은 불필요한 공간적 배경을 소거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에 집중하게 합니다. 동시에 영화 전체를 하나의 앨범 형식으로 표상하는데요. 그 이유는 4:3의 비율로 찍힌 장면들이 마치 필름 사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알리스가 프로그램 미션을 수행할 때도 각각의 결과물을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데, 영화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는 ‘사진’과 ‘기억’이라는 소재가 화면비와 마침맞게 조응합니다.

동시에 이 화면비는 알리스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알리스가 가족이 없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라는 존재론적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하고 있는 거지요. 불분명한 영화의 시대적 배경에, 주인공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서류도 없다는 게 이 영화의 포인트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이렇게 묻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있고, 없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괜찮은가, 라고요.

영화 <애플> 스틸컷 [사진=(주)모쿠슈라픽쳐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알리스가 자신처럼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드라이브 중 차안에서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이별 노래 ‘Sealed With A Kiss’가 흘러나오고, 알리스는 그 노래를 익숙하다는 듯이 흥얼거립니다. 그런데 기억상실증에 걸린 알리스가 어떻게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안나가 그 사실을 알리스에게 인지시키자 그는 갑자기 “여기가 좋겠어요”고 말합니다. 그 순간, 안나는 핸들을 꺾어 길가의 가로수를 들이 받아요.

위 장면 역시 ‘공간과 기억을 찧는’ 행위로 수렴합니다. 그렇다면 알리스가 잊어버린 공간과 기억은 무엇일까요. 아니, 누구와 함께한 공간과 기억을 잊어버린 걸까요. 그리고 그것을 왜 ‘찧는’ 것일까요. 알리스에게는 사별한 부인이 있습니다. 정황상 부인의 이름도 ‘안나’로 보여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안나는 알리스와 함께 같은 프로그램을 수행 중인 여성일 수도 있고, 사별한 부인일 수도 있는 거예요. 영화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고 다시 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당신 곁에 있나요?”

영화의 마지막, 사과를 좋아했던 알리스는 사과가 기억력에 좋다는 말을 듣고, 사과 대신 오렌지를 삽니다. 즉 영화에서 반복하는 ‘공간과 기억을 찧는’ 행위는 일종의 상징적 이미지로 망각과 기억을 동시에 은유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고, 반대로 깨끗하게 잊고 싶다는 제스처일 수도 있는 거예요. 잃어버려도 결코 잊지 못하는 것. 잊고 싶지만 잃어버릴 수 없는 것. <애플>은 당신을 보고, 듣고, 만지고 싶지만 지금 여기에 당신이 없음을 일깨우는 영화입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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