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에게 듣다] 정세균 “나는 왼쪽, 오른쪽 모두 확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명사에게 듣다] 정세균 “나는 왼쪽, 오른쪽 모두 확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5.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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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전 국무총리, 박용채 편집주간과 대담

-코로나 백신 9900만명분 도입, 하반기에는 남아돌 것
-소득주도성장, 방향 옳았지만 속도 빨라
-이낙연, 이재명의 복지담론? 문제는 실현 가능성
-나는 ‘진영논리 작용하는 정치’보다 ‘성과 내는 행정’ 체질
-김대중은 탁월하고, 노무현은 사람 냄새나며, 문재인은 원칙론자
-『백범일지』 『김대중 옥중서신』은 인생의 책, 막스 베버도 즐겨 읽어

‘부드러움’ ‘온화함’. 인간 정세균을 규정짓는 일상적 수식어들이다. 전북 진안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지게질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검정고시를 거쳐 법대 진학, 대기업 해외주재원, 6선 의원에 국회의장, 장관과 국무총리.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 또 있을까. 그리고 숨 고르기를 통한 새로운 도전.

정치인들은 통상 큰일을 앞두고 시대정신을 담은 책을 낸다. 출정의 변일 수도 있고, 지나온 궤적을 담은 인생 얘기일 수도 있다. 그 역시 이번에 『수상록』(이소노미아 출판사)을 폈다. 다만 출정을 앞둔 의례적인 출판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수상록 편집자는 독서신문과 통화에서 “정치인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길래 리더가 되고 그들을 따라가는지 궁금했다”고 출간 동기를 밝혔다. 처음부터 정 전 총리를 염두에 둔 게 아니고 ‘부패와 거리가 있고, 경륜이 있으며, 현직 정치인을 찾은 결과’가 그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독서신문>도 그의 대권 도전 여부를 떠나 인간 정세균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를 지탱해온 것은 무엇인지, 독서 편력은 어떤지 궁금했다.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캠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예상대로 캠프는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대기실에는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인터뷰도 당초 약속보다 늦게 시작했다. 독서편력 부분은 당초 인터뷰에 서면질의를 추가해 보완했다.  

[사진=안경선 PD]

-사무실 오픈한지는 얼마나 됐나요.

“한 2~3주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이제 갓 시작했으니 어수선할 겁니다.”

-직함 없이 지내신 게 얼마 만입니까. 또 강행군입니다.

“사실 일하는 체질이라 하루도 안쉬었어요. 주말에도 일하지요. 지난 주말에도 인터뷰를 두건 하고, 전문가들 하고 토론도 하고 정책조율도 하고. 평생 쉬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과문해서 여쭤봅니다. 총리 퇴직 뒤 실업급여를 받습니까.

“하하, 공무원은 대상이 아닙니다. 고용보험은 민간을 대상으로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요. 공무원은 공무원법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고 연금 수혜대상이어서 고용보험 적용을 제외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일자리가 많이 줄었는데 그런 분들에게 실업급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책 얘기를 해보시지요. 『수상록』이라는 에세이를 냈습니다. 보좌관을 지낸 고병국 서울시의원도 정 전 총리에 대한 책을 냈더군요. 준비된 것들입니까.

“조금 떨립니다. 이름을 걸고 무엇을 한다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사실 국무총리로 임명되기 전에 이 책 출간을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총리가 되는 바람에 책을 내지 못하게 됐습니다. 총리 퇴임 이후에 방역에 관한 경험을 추가해서 냈는데. 독자분들이 어떻게 판단하실까 떨립니다. 『법 만드는 청소부』는 보좌관이었던 고병국 서울시의원이 옆에서 저를 관찰한 것을 쓴 겁니다. 혹시 험담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빼고 쓴 것 같습니다. 험담도 하고 흉도 보고 했으면 훨씬 잘 팔렸을 텐데 이 친구가 그런 센스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웃음)”

그는 검정고시 출신 17명이 공동으로 엮은 『열정 그 길에서 세상의 빛이 되다』(2017년)를 비롯해 『99%를 위한 분수경제』(2011년) 『질 좋은 성장과 희망한국』(2008), 『나의 접시에는 먼지가 끼지 않는다』(2007년),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전략』(1999)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수상록』 서평을 일독했는데 ‘왼쪽에 기울어 있지만 오른쪽에서 볼 때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대목이 눈에 띄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확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편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특히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경청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내 중심은 항상 있지만. 그런 평을 받는 게 나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지향하는 바도 그런 겁니다. 편 가르기 하는 것은 사실 우리 세상을 삭막하게 만드는 겁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제가 ‘코로나 총리 리더십을 말하다’입니다. K방역의 성공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지만, 백신은 늦었고 코로나는 여전해 국민 불안감은 큽니다.

“방역과 백신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확진자 발생률’ ‘사망률’ ‘백신 준비’ 등을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여전히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선두그룹에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백신은 하반기부터 급격하게 접종률이 늘어나서 지금보다는 순위가 많이 올라갈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은 출발은 조금 늦었지만 종착역에는 같이 도착할 것이라고 봅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방역 잘한 세 나라를 꼽으면 한국과 뉴질랜드, 호주를 뽑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호주와 뉴질랜드와 우리가 백신 접종을 2월 말에 같이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나가고 있고 호주와 뉴질랜드는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역뿐만 아니라 백신도 우리가 앞서갈 것입니다. 내년에 국산 백신이 나오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이 그쪽에 투자하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세금을 많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2,500억원 정도 투입을 하고 있는데 성과가 드러난다면 백신 독립이 가능하리라고도 봅니다.”

-처음부터 백신 쪽에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국민들 바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준비를 했는데 그간 축적된 노하우 측면에서 다국적 기업과 우리 기업 간에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지요. 백신은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해서 하는 거니까요. 특히 임상이 제일 관건입니다. 가령 임상 3상 같은 경우는 돈이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다국적 기업과 국내 바이오 업체는 규모나 역량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건 인정해야 합니다.”

-예정대로 오는 11월이 되면 집단면역이 이뤄질까요.

“전혀 문제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금년 하반기에는 백신이 조금 남아돌 수 있어서 그것을 내년에 쓸 수 있도록 하는 안도 다 만들어놓았습니다. 정부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남아돌 정도라면 그만큼 수입량에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9,900만 명분을 수입하기로 했으니까 다소 과도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반기가 되면 백신이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을 내년에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잘 조절해야 합니다.”

[사진=안경선 PD]

-주제를 옮겨보지요. 6선 의원에 국회의장, 장관에 국무총리까지 지내셨습니다. 정치와 행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치는 조금 자유분방하고 또 대국민 소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진영논리가 작용하는 측면이 있고요. 행정은 무엇보다도 과정의 투명함과 공정함이 강조되며 성과를 꼭 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개성은 죽여야 합니다. 저는 사실 행정 체질입니다.

2006년도에 산업부 장관을 했는데 그때 제가 가장 강조한 게 적극 행정이었습니다. 행정이 조금 관료적이고, 책임 안 지려고 하고, 소극적이면 미래를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행정이 조금 실수하더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가 상징적으로 한 이야기가 ‘나의 접시에는 먼지가 끼지 않는다’입니다. 접시를 자주 사용하거나 세척을 하다보면 떨어뜨리면서 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찬장에 넣어두면 먼지가 낍니다. 그래서 ‘넣어두지 말고 잘 활용해라.’ 이제 그게 요즘 표현으로는 적극 행정입니다. 행정이 가끔 어떻게 하면 노(NO)를 할까 궁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고 어떻게 하면 예스(YES)를 할까 궁리하자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총리로 있을 때도 적극 행정을 펼친 공무원들에게 적극 행정 접시를 상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적극 행정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지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특히 규제나 이런 것 때문에 국민들이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미래 산업 부분은 규제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규제가 있으면 공직자들은 편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공직자들은 규제혁신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수상록』에서 우리 사회를 ‘초갈등사회’로 표현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어떤 것입니까.

“정치 쪽이 그런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기업 같은 경우에도 어떤 난제가 있을 때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벼랑 끝까지 가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선진화되는데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등이 증폭하고 더 커지기 전에 초동 단계에서 대화와 타협하는 문화가 전 분야에 확산되면 선진국으로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의 갈등은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지난해 검찰 개혁이 국민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개혁이냐 아니냐를 놓고 대결 양상을 보였지요. 검찰 개혁에 대해 국민들이 지향하는 바나 방법론, 개혁의 수준 등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해나가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 점은 지금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서울 부산시장 보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패배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정책 실패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대선과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밀어주면서 기대를 크게 했지만 부족하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국민들이 회초리를 아주 심하게 들었습니다.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다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누구보다도 당의 지도부가 어떻게 다시 국민적인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 한 달여가 지났지만, 민주당을 못 미더워하는 목소리가 여전합니다.

“원래 선거로 심판받고 나면 패배한 정당에는 후폭풍이 있습니다. 지도부가 후폭풍을 잘 감내하고 제대로 관리하면 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은 후폭풍이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송영길 지도부가 잘 감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확실하게 변화해서 국민을 제대로 섬기는 노력이 있어야 국민들의 마음이 풀릴 겁니다.”

[사진=안경선 PD]

-소득주도성장 등 지난 4년간의 경제정책을 놓고 말이 많습니다.

“2011년에 제가 주장했던 분수경제론은 소득주도성장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론 말고도 ‘혁신경제’나 ‘공정경제’ 이런 것들을 표방했는데 소득주도성장론만 부각됐어요. 대국민 소통 실패라고 봐야 합니다. 소득주도성장론이 핵심이 아니고 ‘공정경제’나 ‘혁신경제’가 더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이 국민들에게 충분히 전달이 안 됐고 코로나가 닥치면서 모든 정책이 그 이슈에 가려져 버렸습니다. 한국판 뉴딜은 이 문제의 대안입니다. 이 중에서도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진행만 된다면 코로나 회복 국면에 정부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소득주도성장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속도가 어땠느냐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 ‘소비-투자-생산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로 설명되는 소득주도성장의 콘셉트나 철학에는 동감합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생산과 분배를 함께 고려하는 안이어서 한국 경제 문제의 현실적인 처방이 될 수 있는 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의 관점에서 최저임금이 첫해와 둘째 해에 과도하게 올랐습니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덮쳤고요. 처음에 조금만 속도 조절을 했으면 저항에 부딪히지도, 그 정책이 폄훼되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측면이 큽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가 여러 복지 담론을 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안도 실천이 안 되면 그만 아닙니까. 정당 개혁도 그렇고 우리 사회 개혁이나 국가 경영도 어떤 안이 나왔을 때 실천력이 담보되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지금 정책을 드러내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드러난 것으로 평가하기는 조금 이릅니다. 다만 국민을 대상으로 좋은 정책을 내놓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 정책을 내놓았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등은 국민들께서 잘 판단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동산 문제는 백약이 무효인 듯합니다.

“가격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지금 가격이 과도하게 올랐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가격이 계속 오르면 안 됩니다. 부동산 관련 세제나 금융제도 이런 것 중에 조금 불합리한 부분은 손을 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 가격 안정, 후 합리화’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부동산 투기가 용인되거나 재현돼서는 안 됩니다. 국민 모두가 누려야 될 권리가 주거권인데 다른 사람이 누릴 주거권을 빼앗거나, 그걸 가지고 투기를 해서 돈벌이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암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무주택자나 ‘1가구 1주택자’들을 보호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부동산을 이용해서 투기하려고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투기 수요를 억제하고 공급 능력을 대폭 확대해서 주거 안정을 기해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가 투기 수요를 억제하고 공급 능력은 늘려서 수급 안정이 돼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중산층에게는 합리적인 수준의 가격으로 자가 주택을 보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또 주거 빈곤층에게는 대규모의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해서 주거 안정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공공과 민간이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부동산의 기본은 시장 원리입니다. 지금 가격이 이렇게 올랐다는 건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제, 금융, 교육, 국가 균형발전 등 부동산 문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맞물려서 작용합니다.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으로 분산됐으면 수도권에 집이 이렇게 더 필요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 4년동안 정부에서 지방 균형발전에 대한 여러 시도를 해왔지 않습니까.

“조금 부족했다고 봐야 합니다. 지난해 수도권 인구 집중이 심화되어서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인구를 초과했습니다. 단군 이래 초유의 일이지요. 주거 문화나 가족 개념이 바뀌어서 가족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결혼해서도 부모 밑에서 살았다면 요즘은 세대 분화를 합니다. 심지어 결혼을 하기 전에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집이 또 더 필요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주택이라는 재화는 공급되는 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현상이 작용해서 부동산 문제가 온 것이지요.

-결국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서는 세제나 금리정책, 교육, 국토균형발전까지 함께 고민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이런 것들은 중장기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은 규제를 통해서라도 가격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국민들을 위해 필요합니다.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동원하는 것이지요.”

[사진=안경선 PD]
[사진=안경선 PD]

-독서 얘기로 넘어가 보시지요. 깡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성장기 독서경험은 어땠나요.

“1950년대만 해도 산골 마을에 변변한 책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지요. 우선 만화책을 본 적이 없어요. 시골에는 만화책이라는 게 없었으니까요. 교과서 말고는 책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보시는 책을 초등학교 때 읽었습니다. 한때 면의원까지 하셨던 아버지는 조상 중에 5대조가 사간원 대사간에 호조, 병조참판을 지내셨다는 사실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이 지방의 지도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 같은 걸 심어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선친의 독려로 천자문을 읽었습니다. 제게 천자문의 ‘학우등사(學優登仕 : 많이 배우면 벼슬에 오를 수 있다)’라는 구절을 읽히며 담뱃대를 탁탁 내리치시던 선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해서 어머니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궜습니다. 불타고 남은 나무뿌리 캐느라 손목이 얼얼했습니다. 아버지께 고등공민학교라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허락해주셨습니다. 정식 학력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중학 과정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고 검정고시에 붙었어요. 그때 비로소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이나 세계 명작들을 접할 수 있었지요. 참 독서에 목말랐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시험 준비를 하면서 정약용의 실학과 실용주의를 배웠는데, 내 선조라는 사실이 매우 뿌듯했습니다. 어렸지만 정약용 같은 선각자가 있었으면 우리도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테고, 곤궁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의 책을 꼽는다면 어떤게 있을까요. 

“법대 진학 뒤 인권변호사의 꿈을 꿨습니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다 훗날 정치에 뛰어들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2학년 때 유신헌법이 선포됐어요. 존경하는 교수님 한분이 유신헌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법조인 꿈을 접었습니다. 이후 운동권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생회장에 출마했지요. 시골 촌놈이 당선된 건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잡혀가는 모습을 보며 자괴감과 울분이 치밀었습니다. 암울했던 유신체제를 겼으면 읽었던 게 『백범일지』입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에서 뜨겁게 타오른 선생의 삶과 사상을 읽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는 했습니다.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벼랑에서 잡은 가지마저 손에서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장부’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안전 운행보다는 가끔은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었습니다.

 법조인 꿈을 접고 나서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동아일보>에 들어갈 기회도 얻었는데 이른바 백지광고사태가 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고, 채용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국제종합무역상사에 입사했습니다. 다만 일하면서 한 켠에 정치 미련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접한 게 김대중 선생의 『옥중서신』입니다. 이희호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투옥과 망명 그리고 가택연금 등 수차례의 죽을 고비 속에서도 한 번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꺾이지 않았던 그의 삶은 등불이 되었고, 훗날 선생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됐습니다.”

-정치 이력에 가장 영향을 받은 책은 어떤 게 있습니까.

“은사인 이문영 교수님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계셨던 분인데, 출마를 앞두고 찾아뵙자 “취직할 요량이면 그만두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은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구태를 많이 봤다”며 “반독재투쟁을 했던 이들이 기회가 열리자 권력에 물들어가는 모습에 실망이 컸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런 측면에서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버는 정치가의 덕목으로 열정, 책임감, 균형적 판단을 제시했습니다. 지도자의 자질은 신념과 책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균형을 찾는데 달려있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는 유발 하라리의 『초예측』, 홍성국 의원이 쓴 『수축사회』가 세상을 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여러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가 앞으로도 쉽게 맞이하기 어려운 지도자입니다. 정말 탁월해서 우리가 아무리 발 벗고 달려도 못 따라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분이 걸어온 길이나 노력, 결단력 등 이런 것들을 귀감으로 삼으면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사람 냄새가 나는 분이었습니다.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나하고는 캐릭터가 다른 데도 아주 잘 맞았어요. 문재인 대통령은 원칙론자입니다. 여간해서는 원칙을 잘 허물지 않습니다. 소신이 뚜렷한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경청을 합니다. 다들 될 만한 분들이 되셨습니다. 대통령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정리=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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