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박훈정의 누아르 멜로, ‘낙원의 밤’
[송석주의 영화롭게] 박훈정의 누아르 멜로, ‘낙원의 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4.18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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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낙원의 밤> 스틸컷

영화 <낙원의 밤>은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의 각본을 쓰고, <신세계> <브이아이피> <마녀> 등 주로 잔혹한 범죄 장르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동시에 이 영화는 박훈정의 첫 멜로드라마‘처럼’ 보입니다. 누아르의 외피를 두른 처연한 사랑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왜냐하면 아무리 말을 바꿔 표현하더라도 <낙원의 밤>은 결국 범죄 집단에 의해 가족을 잃은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니까요.

그럼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하는 데 왜 하필 누아르가 필요했느냐고 질문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영화에서 누아르는 단일한 장르로 수렴하기보다는 멜로드라마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데 요긴한 시각적·형식적 스타일입니다. 마초적 남성들이 득실거리는 누아르에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틈입할 때, 의외로 색다른 사랑 이야기가 연출될 수 있거든요. 범박하게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 것보다는 칼에 맞아 죽는 게 덜 진부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포인트는 ‘덜’ 진부하다는 것이지 진부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낙원의 밤>의 가장 큰 단점은 누아르의 분위기와 스타일만 강조함에 따라 인물들의 관계맺음이 다소 피상적으로 형상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인물 혹은 인물 간의 역사가 많이 누락되어 서사의 전후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단서들이 거의 없어요. 또 주인공의 가족들이 몰살되는 맥락은 낡고 뒤떨어져 있으며, 강박적이고 설명적인 대사는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의 밤>은 장르적으로 꽤 재미있습니다. 일부 평자들에 의해 이 영화가 ‘서정적 누아르’(정시우) ‘내성적 갱스터’(송경원)로 운운되는 이유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누아르는 서정적이기 힘들고, 갱스터 영화는 내성적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낙원의 밤>은 두 가지의 이질적인 요소가 적절한 하모니를 이루면서 나름대로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누아르 멜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 <낙원의 밤> 스틸컷

영화학자 니노 프랑크가 처음으로 주창한 누아르는 문자 그대로 검은(noir) 영화라는 뜻입니다. 비 내리는 음산한 골목과 폐공장, 비정함이 흐르는 회색 도시, 차갑고 쓸쓸한 푸른빛의 해변 등은 누아르가 사랑하는 공간들입니다. 이러한 ‘검은 공간’에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서사가 마침맞게 조응하는 이유는 누아르의 주인공들이 대개 거악(巨惡)을 물리치는 영웅이 아니라 죽음의 운명에 속박된 비관주의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낙원의 밤>과 유사한 영화로는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와 송해성의 <파이란> 그리고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 등이 있습니다. 세 편 모두 누아르의 공간에 멜로드라마의 서사를 입힌 영화들이죠. 여기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모두 조폭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상당히 순수하고 인간적이며 소년성이 짙게 배인 인물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조폭의 세계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고, 자주 불화하며,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되지요.

누아르의 남자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건 바로 팜므 파탈입니다. 그간의 누아르에서 팜므 파탈은 대부분 남성들의 ‘성적 소유물’이거나 남성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상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남성들의 액션에만 반응하고, 존재하는 리액션으로서의 캐릭터였던 거죠. 하지만 <낙원의 밤>에서 팜므 파탈로 위치 지을 수 있는 재연(전여빈)은 조금 달라요. 그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독특한 매력의 팜므 파탈입니다.

이는 자신의 영화에서 주로 여성을 기능적으로 소비했던 박훈정이 페미니즘 평자들의 지적을 적극 수용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우연의 가능성이 농후했던 <마녀>와도 살짝 결이 다르지요. 시대의 감수성과 조응하는 팜므 파탈의 매력은 영화에 긍정적 활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낙원의 밤>을 박훈정의 두 번째 멜로드라마로 규정할 수도 있겠네요. <신세계>를 ‘동성애 누아르 멜로’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낙원의 밤>은 ‘이성애 누아르 멜로’가 아닐까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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