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믿음의 책 한 모금] 작가 하퍼 리의 당부... “앵무새를 죽이지 마세요”
[서믿음의 책 한 모금] 작가 하퍼 리의 당부... “앵무새를 죽이지 마세요”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4.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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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 [사진=연합뉴스]
하퍼 리. [사진=연합뉴스]

1956년 12월 미국 뉴욕, 서른 살의 독신 여성 하퍼 리는 길을 나선다. 뉴욕 생활 7년,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근무처인 항공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인 앨라배마주 먼로빌에 내려갔지만, 올해는 휴가를 얻지 못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던 차에 마이클 브라운과 조이 브라운 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부부는 어릴 적 친구 트루먼 커포티의 소개로 2년 전 알게 됐는데, 각각 작곡가와 작사가이다.

곤궁한 형편의 하퍼 리가 소소한 선물을 내놓자 부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흰 봉투를 건넨다. 봉투에는 “네가 쓰고 싶은 작품이 무엇이든 그것을 쓸 수 있도록 네 직장을 1년간 쉬었으면 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메모가 들어 있었다. 번역가이자 평론가인 김욱동 서강대학교 교수가 저서 『하퍼 리의 삶과 문학』(열린책들)에서 밝힌 『앵무새 죽이기』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다. 브라운 부부의 지원으로 하퍼 리는 집필에 몰두해 훗날 4,000만부를 판매한 베스트셀러 『앵무새 죽이기』를 1960년 세상에 내놓는다.

오늘날 미국 학교에서 인종갈등 해결의 교과서로 활용되는 『앵무새 죽이기』는 앨러배마주의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성폭행 사건을 다룬다. 백인 여성 마옐라 바이올렛 유얼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토머스 로빈슨을 어린 화자인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가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천대받던 흑인에게 쏟아지는 비이성적 가학과 사회적 차별,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애티커스 변호사에게 쏟아지는 멸시를 어린 스카웃의 시선으로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정황상 무죄에 가깝지만 용의자가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성급히 처벌하려는 배심원들에게 애티커스 변호사는 “법정은 오직 배심원단이 건전한 만큼 건전할 수 있다”고 공정한 배심을 호소하지만 결국 중형이 선고된다. 결과에 울분을 토하는 젬(스카웃의 오빠)에게 애티커스는 “오직 애들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라고 한탄한다.

작중 스카웃의 실제 인물인 하퍼 리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낯가림이 심했지만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와 함께 자란 트루먼 커포티는 단편소설 『추수감사절 방문객』을 통해 “체구가 작지만 단단한 말괄량이로 지옥에서 풀려난 듯한 무서운 레슬링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했다. 대학 시절에도 화장은 물론 머리 손질도 하지 않고, 파이프 담배를 즐긴 것으로 알려진다. 상스러운 속어나 욕설을 자주 입에 담았다는 주변 이야기도 전해진다. 애초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에 입학했지만 글쓰기에 대한 강렬한 갈망으로 4학년 1학기를 남기고 뉴욕으로 떠난다. 아파트 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서점 일을 그만두고 두 번째로 얻은 직장은 항공사. 생업에 치이다 보니 소설 쓸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브라운 부부의 지원을 받는 행운을 얻는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1933년 먼로빌 인근에서 월터 렛이라는 흑인이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은 실제 사건을 반영했다는 평을 받는다. 김욱동 교수는 당시 윌터 렛을 구명하기 위해 다수의 지역 유지가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그중에 애머서 리(하러 피의 아버지) 변호사가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실 하퍼 리가 집필한 최초의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1960)보다 뒤늦게 출간된 『파수꾼』(2015)이었다. 브라운 부부의 지원으로 집필에 전념한 하퍼 리는 1957년 『파수꾼』의 원고를 J. B. 리핀코트 출판사에 투고하지만, 수정출간을 제안받는다. 제안대로 스물여섯 살의 직장 여성 화자가 아니라 여덞 살 소녀의 시각으로 변화를 줬는데, 그 작품이 바로 『앵무새 죽이기』이다. 이 작품으로 하퍼 리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는다. 문단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지만 그런 관심이 하퍼 리에게는 악재로 작용했다. 부담이 너무 컸던 나머지 2016년 작고하기 전까지 새 작품 출간은 물론 언론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란 제목에 담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앵무새를 죽이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다. “어치(까마귀과 조류)는 쏴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애티커스 말의 의미를 아이들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자 이웃집 아줌마 모디 앳킨슨은 이렇게 대답한다. “(앵무새는)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피부색을 이유로 죽음으로 내몰린 흑인을 빗댄 표현이다. 오늘날 무고하게 희생되는 앵무새가 없는지, 혹 알면서도 묵인하는 배심원같은 태도를 지니지는 않았는지, 하퍼 리는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건넨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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