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실비 제르맹이 선사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호박색 밤』
[책 속 명문장] 실비 제르맹이 선사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호박색 밤』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4.04 2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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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죽은 자들은 끊임없이 산 자들로부터 멀리 밀려나고 있었다. 한때 신에게 버림받은 자들을 수용소로 추방했듯이, 이제 사람들은 높은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싸인 이 들판 한구석으로 죽은 자들을 추방했다. 집들과 산 자들과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러나 이 새 묘지는 아직 비어 있었다. 지난 전쟁 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옛 묘지 맨 안쪽에 서둘러 임시 공동 묘혈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해야 했었고, 그후로는 이 마을에서 단 한 번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터였다.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은 굳건히 버텼다. 마치 자신들의 수명을 두 배로 늘림으로써 총기나 폭탄이나 산탄에 맞아 제명을 채우지 못한 채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그 모든 생명들의 원한을 씻으려는 것 같았다.<30쪽>

그는 이 욕망의 정체를 헤아리기를 거부한 채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과 끊임없이 싸웠다. 미리부터 진 싸움임을 알았기에 자기 자신과 더 치열하게 맞섰다. 결국 그 자신도 형제인 그녀에게 미친 놈과 같은 기질을 지닌 터였다. 하나의 대상에 고스란히 바쳐진, 절대적인 사랑을 지향하는 마음.<36쪽>

상처받고 배신당한 아이인 그는 말의 이 마술적인 힘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가 끊임없이 늘리고 확장하고 타오르게 하고 싶은 유일한 힘이었다.<59쪽>

두 사람을 결합시킨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욕망도 아니었다. 모든 것에서, 모두에게서,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조차 추방되었다는 느낌, 세상에서의 부재라는 동일한 느낌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다.<71~72쪽>

『호박색 밤』
실비 제르맹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560쪽 | 1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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