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대한민국] ‘너무 지친’ 한국 사회, 권수영 교수의 공감과 치유법
[책 읽는 대한민국] ‘너무 지친’ 한국 사회, 권수영 교수의 공감과 치유법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2.26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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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장 [사진=안경선 PD]

“기성세대의 답을 강요하지 마라“
“과거의 실패와 미래의 불안은 괄호치기하라”
“사회적 위기는 분노감 표출 대신 연대로 이겨내야”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한국 사회는 지쳐있다. 그것도 꽤 많이. 코로나19로 일상이 변한 지 1년이 지났다. 자영업자는 물론 학생, 취업준비생, 직장인 등 모두가 미증유의 상황을 맞았다. 급변한 일상에 적응하느라 많은 기력을 쏟아야 했다. 꼭 코로나19 때문만도 아니다. 아동학대 범죄, N번방 사건, 정치인들의 성추문 등 각종 암울한 소식이 시민들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힐링을 찾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힐링도 쉽지 않다. 도대체 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공감과 치유의 아이콘 권수영 연세대 교수가 최근 책 『치유하는 인간』을 펴냈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레드박스) 『나쁜 감정은 나쁘지 않다』(그리고책)에 이은 역작이다. <독서신문>은 권 교수가 지쳐있는 한국 사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그 해답은 무엇인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23일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진행됐다. 

그는 한국 사회에 떠도는 힐링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재정립한다. 그가 말하는 힐링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시작된다. 『치유하는 인간』의 목차는 ‘안아줌’(Holding) ‘공감’(Empathy) ‘판단 중지’(Epoché) ‘수용’(Acceptance) ‘애도’(Lamentation) ‘친밀감’(Intimacy) ‘연대’(Network) ‘성장’(Growth) 등 8가지 테마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앞글자를 모두 따면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완성된다. 권 교수는 “여덟 가지 주제가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무엇이 먼저인지 잘 모를 정도로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미 하버드대학원에서 기독교 문화 석사, 버클리신학대학원에서 종교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현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상담진흥협회장, 한국상담서비스네트워크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사진=안경선 PD]

-한국 사회에서 힐링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힐링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우리가 그동안 힐링에 대해 신경을 못 썼다. 개발도상국의 특징 중 하나가 속보다 겉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빌딩을 짓거나 공장을 짓는 데 열중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보이게 된 계기가 88올림픽인데 큰 비용을 들여 건물과 경기장을 지었다. 사실 그 안에는 많은 아픔이 있다. 판자촌을 걷어내면서 그 사람들이 어디라도 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면이 썩어들어가고, 소외되고 있었으며, 버려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겉만 꾸미다 보면 언젠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기가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겉만이 아니라 내적인 성장이 진정한 성장이며 성숙이다. 그래도 우리가 어느 순간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 같다. 살아가면서 아픔도 있었고 재난을 겪으면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걸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상담이라는 학문이 떠오르면서부터다.”

-요즘 힐링은 참 여러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과소비, 쉼, 여행 등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진정한 힐링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 사회에 난무하고 있는 힐링에 대해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 번째는 힐링이 모두 바깥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힐링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맛집에 못 간다고 생각해서다. 다섯 명 이하로 다녀야 하니까. 맛집에 가서 음식을 맛있게 먹어도 그 느낌은 8시간이 채 못 간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외부에서 무언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힐링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개인들이 지나치게 자기애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가령 SNS의 장점은 서로를 연결한다는 점이다.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을 연결할 수 있는데 우리는 내가 구매한 물건, 얼굴, 여행지 등 자신의 게시물만 자랑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강함을 염원하는 거다. SNS에서 자기만을 드러내는 행동은 치유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다. 치유는 내 자원을 갖고 다른 사람과 연결하면서 결국 나 자신을 치유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치유할 수 있는 자원을 만드는 것이 본질이다.”

-자기 안에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마련돼 있어야 하나

“내 마음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상담 서비스는 그런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출구다. 하지만 주변에서 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부모에게 이야기했더니 “네가 너무 민감한 거야”라며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한다. 대신 나를 판단하고 계도하려고 한다. 상담사는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받아준다. 물론 상담사 중에서도 공감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훈련받은 사람이 필요하다.”

[사진=안경선 PD]

-사람들은 상담사에게 가기 전에 흔히 가까운 지인에게 먼저 고민을 나눈다.

“부모들이 들으면 놀라겠지만, 자녀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들은 부모다. 그 이유는 부모에게 품는 기대감이 크다는 것이다. 자녀에게는 부모에게 공감받고 싶은 마음과 나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비록 자식이 성인이 됐어도 마찬가지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걸 원했는지 꺼내놓을 수 있으면 치유가 시작된다. 지금이라도 부모가 자녀에게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줬던 일이 있었니?”라고 물어보면 가정 내에서도 치유의 역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대면 상황에서 가정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더 화목한 가정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현실에서는 가정 폭력이 늘어나고 있다. 이와 연관이 있는 건가.

“전문가들이 최근 가정폭력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를 가정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환경을 지적하곤 한다. 가정에 있으면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고 분석한다. 이 이야기는 가족이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올바른 진단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이미 집안의 분위기가 항상 아슬아슬하게 유지됐다는 것이다. 집안 분위기가 갈등의 임계점을 넘기 전에 아이가 독서실이나 학원에 가는 등 상황을 피해버리니 갈등 상황을 겪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치유의 자원을 찾아낼 수 있으면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자녀들도 줄어들 수 있을 것 같다.”

-책에 ‘판단 중지(epoché)’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생소하다.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라는 말과 통할 것 같다. 우리는 보통 과거의 아픔에 메어있기도 하고 미래의 걱정을 당겨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한다. 과거의 실패감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할 때가 많다. 결국 판단 중지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불안을 잠깐 중지하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대해 잠깐의 괄호 치기가 필요하다. 과거를 지우개로는 지울 수는 없으니 최선을 다해서 괄호 안에 묶어놓으려고 해야 한다.”

-사회적 연대감을 중시하는 것 같다.

“2016년 촛불집회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세계가 놀랐다. 수만명이 모였는데 폭력 사범이 한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나라에 대한 불안을 온 광장에서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연대감과 연관된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폭력을 행사하려 하면 말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집회가 끝나면 쓰레기를 줍기도 했다. 위기 때는 연대감을 형성해야지, 상대방을 향한 분노를 표출해서는 안 된다.

1997년 외환 위기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컸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반지와 패물을 갖고 은행에 갔다.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불만이 분명 있었을 텐데 지혜롭게 연대하는 자세를 보였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연대감이 강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코로나 방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연대감이 중요하다.”

[사진=안경선 PD]

-힐링에서 8가지 주제를 말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위기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희망이 없어서 결혼도 안 할 거라는 말을 한다. 다행히 결혼할 생각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애는 안 낳을 거라는 얘기를 한다. 아이를 낳으면 그 양육비를 어떻게 감당하냐는 걱정 때문에 여기저기서 ‘답 없다’라는 표현이 많이도 등장한다. 책에서 말하는 ‘성장’은 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성장은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다. 창의적으로 사는 사람은 답을 믿지 않는다. 정해진 답을 답으로 믿지 않고 다른 풀이법이 있다고 믿고 그 길을 가보는 사람들이다. 그건 미래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유명한 창업가들은 대학 졸업장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식이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길 기대한다. 좋은 직장을 나와도 그게 좋은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삶을 의미 있고 신나게 살아내는 게 중요하다. 한국 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기성세대가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코로나19와 사회적 참사로 인한 사망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늘 아프게 한다. 한국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애도의 방식을 만들었으면 좋겠는가.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는 애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화였다. 유족들이 고인의 얼굴에 염을 하고 보자기로 감싸는 모습을 보면 모두 울음을 참지 못한다. 이런 문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남겨진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하며 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고인이 누워 있는 관의 덮개를 열어놓고 고인과 관련된 추억을 이야기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우리가 애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의 애도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 상징적인 일이 필요하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뉴욕타임스 1면 전체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에 대한 부고를 넣었다. 반면, 우리는 이런 것에 관해서는 여건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의 감정이 서로 연결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은 섬처럼 느껴진다. 함께 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아픔을 공유하고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

-준비 중인 저서가 있나

“가족은 치유 공동체이자 지지 공동체이다. 그런데 가족에 의해 받는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꼭 물리적인 폭력 때문만이 아니라 자녀들이 언어폭력을 비롯해 자신이 부모로부터 충분한 기대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감 있게 살지 못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의 나로 평생 살 수밖에 없는 심리 구조를 갖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족으로부터 적정한 거리를 두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며 현재의 나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이것은 가족주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의 큰 숙제인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의 거리두기’라는 가제를 두고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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