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 대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일필휘지?... 대작가들의 ‘마감분투기’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2.25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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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유명 작가는 글재주가 빼어난 타고난 글쟁이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대중에게 그들은 마감의 압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글 한 편을 ‘뚝딱’ 써내는 비범한 인물이다. 너무 잘 써 판사들이 돌려봤다는, 원고지 130매 분량의 「항소이유서」를 유시민이 앉은 자리에서 써내려갔듯, 그들은 ‘일필휘지’를 구사하는 능력자란 인식이 통념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책 『작가의 마감』(정은문고) 속 일본 유명 작가 30인의 ‘마감분투기’는 그런 통념을 산산이 깨부순다.

『인간 실격』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1909∼1948)는 <미야코신문>에 연재한 원고지 10매 분량의 글을 쓰면서 원고지를 찢으며 집필의 고통에 신음했다. 그는 “수필은 소설과 달리 작가의 언어도 ‘날 것’이기에 매우 조심해서 쓰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준다)”며 “사흘이나 웅얼웅얼 읊조리며 쓰고는 조금 있다 찢고 또 쓰고는 조금 있다 찢으면서 끙끙댔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결국 술의 힘을 빌리게 됐는데, 조용히 마시려던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취기가 오르자 형편없이 망가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시의 신뿐만 아니라 천신님도 나를 내치셨는지 전혀 쓰지 못했어. 아, 싫다”며 잡지사 편집장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원고 마감일 연장을 요청했다. 가까스로 원고지 64매가량의 글을 완성한 상황에 그는 “내일부터 힘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쓸 작정이지만, 쓰려고 하면 괴로워집니다. 누군가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라고 글쓰기의 고통을 토로했다.

「무희」 「아베일족」 『기러기』 등의 작품으로 일본 근대문학에 큰 획을 그은 모리 오가이(1862~1922)는 동생이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에 게재할 글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회의감에 빠진다. 그는 “무얼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느낀 바를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무엇을 봐도 그때그때 느끼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그 느낌을 나는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하고 있을까?”라고 우울감에 휩싸였던 경험을 전한다.

사카구치 안고(1906~1955)는 각성제 힘을 빌려 집필에 몰두했다. “산만하고 느슨해진 주의력을 높이려고 각성제를 다량 복용하고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버텼지만, 글을 완성한 후에는 반대로 잠이 오지 않아 고생했다. 궁여지책으로 정량의 열 배쯤 되는 수면제를 복용하며 버티다 결국 신경쇠약과 수면제 중독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됐고, 그 내용을 「나는 이미 나았다」는 글에 담았다.

때때로 글쓰기의 ‘화’는 엉뚱한 곳에 불똥을 전한다.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순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의 주인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자주 짜증이 난다. (중략) 글 쓸 때 집안사람에게 걸핏하면 큰소리를 냈다”며 “(글을 쓰는 건) 천벌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에겐 편집자들의 원고청탁이 줄을 이었는데, 그는 「메문 문답」 글을 통해 편집자와의 실랑이 일화를 소개한다. 편집자 “원고지 두 장이든 세 장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작가 “욕을 들을 게 뻔합니다” 편집자 “아니, 손해는 아닙니다. (중략) 유명 작가의 작품이면 좋든 나쁘든 항상 작가가 모든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작가 “그렇다면 더욱 일을 맡을 수 없지 않습니까?” 편집자 “하지만 당신 정도의 대작가라면 한두 편 나쁜 작품을 낸들 명성이 떨어질 걱정은 없지 않습니까.”

때때로 거짓말로 편집자의 마감 압박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원고청탁을 협상할 때는 작가가 갑일지 몰라도 일단 수락한 이후 편집자는 작가에게 마감을 재촉하는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기세가 얼마나 매서운지 소설 『낡은 집의 춘추』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우메자키 하루오(1915∼1965)는 집으로 찾아온 편집자를 “체온이 38.7도”라는 거짓말로 돌려보내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37.5도라고 진실을 말하면 당장 일어나 글을 쓰라고 강요할 게 뻔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한다. 이처럼 대가들 역시 마감의 압박에, 창작의 고통에 빠져 우울감을 맛봤다. 일본을 대표하는 탐정소설가 유메노 규사쿠(1889~1936)는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장탄식을 내뱉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기뻐하는 건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글쓰기 대가들의 고통은 범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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