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2차 피해...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그 이후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2차 피해...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그 이후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2.15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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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지만, 성범죄만큼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대다수 성희롱, 성추행이 은밀하게 이뤄지고 또 몸보다는 마음에 상처를 내는 탓에 ‘증거’ ‘증인’ 확보가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증거 확보가 쉬운 성폭행의 경우에도 피해자가 혼란을 겪는 사이 증거채취 기한을 넘긴다면 혐의 입증은 요원해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직접 증거 없이 피해자의 호소와 가해자의 반박만 맞붙는 상황에서 초점은 사건 전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보인 ‘가해자다움’과 ‘피해자다움’ 등의 정황 증거로 옮겨가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같은 사안을 놓고 여러 해석이 뒤따른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중앙법원은 지난달 간접적으로나마 “여러 진술에 비춰보면 피해자가 박 전시장의 성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박 전 시장의 가해 혐의를 인정했다. 인권위원회 역시 피해자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피해자를 무고한 가해자로 간주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피해자 측 변호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에 따르면 지난달 피해자를 무고죄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고발하겠다며 친문 성향 시민단체인 ‘적폐청산 국민참여연대’가 모집한 고발인단 참여 인원이 1,000명을 넘었다. 박 전 시장이 성범죄에 따른 불명예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 피해자의 거짓말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지난 6일에는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편지가 공개됐다. 박 전 시장 추모사업회 ‘박원순을 기억하는 사람들’(박기사)이 강씨에게 직접 받았다고 밝힌 해당 편지에는 “나의 박원순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중략) 40년을 지켜본 내가 아는 박원순 정신의 본질은 도덕성”이라며 “저와 우리 가족은 박원순의 도덕성을 믿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편지는 박 전 시장 지지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박 전 시장의 가해 혐의를 부인하는 내용이어서 사실상 피해자는 2차 피해를 입는 상황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 이제는 일상화되다시피 한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는’ 구조가 되풀이된 셈이다.

그나마 박 전 시장 사건은 피해자에게 보내진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내용을 담은) 텔레그램 메시지가 증거로 작용했지만, 과거 여러 사건에서는 그런 증거조차 존재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박재동 화백의 경우 2011년 결혼 주례 부탁을 위해 찾아온 후배 여작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성적인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증인·증거가 없고 사건 발생 7년 후인 2018년에 뒤늦게 문제가 제기되면서 유야무야되는 형국이다. 박 화백은 해당 사건과 교내 성희롱 발언 등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로부터 3개월 정직 징계를 받은 사안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2011년 사건은) 객관적 근거로써 입증된 바 없다”는 판결을 받아 성추행 혐의를 패퇴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련 의혹을 처음 보도한 SBS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청구의 소송에서는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고, 허위 제보할 동기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1, 2심 모두 패소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피해를 입은 지역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성추행을 당한 이후 재차 주례를 부탁했으며, 사건 이후 지인과 해당 사건을 주제로 농담을 나눈 점 등이 ‘피해자다움’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갖가지 ‘기획 미투’ 의혹에 시달렸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의 경우에는 좀 더 가혹했다. 성범죄에 사실상 처음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해 유죄판결이 내려졌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각종 비난에 시달렸다. 안 전 지사의 부인은 ‘피해자가 안 전 지사와 불륜관계였다’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가 세 번째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스위스 출장에서 돌아와 지인과 나눈 메신저 대화를 공개하며 피해자 행동이 ‘피해자다움’에 어긋남을 지적했다. 메신저 내용은 “(안 지사님께서) 스위스 다녀오고선 그나마 덜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 릴렉스와 생각할 시간을 많이 드린 것 같아서 뿌듯해요”였다.

성추행을 당한 후 다시 주례를 요청하고, 성폭행을 당한 뒤 가해자의 기분을 챙기는 모습은 재판부가 중요하게 봐온 ‘상식적 관점’에 어긋난 행동일 수 있다. 그간 우리 사회는 ‘피해자라면 응당 A 뒤에 B 행동을 해야 하는데, C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피해자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현실 상황 속에서 (다수의 피해자가 보이는) C 행동이 꼭 비정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안 전 지사의 미투를 폭로한 김지은씨는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직장에서 해고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치지 못했고, 내게 주어진 일을 망치지 않으려 티 내지 않은 채 업무를 지속했다. 나는 그날 안희정의 ‘미안하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믿어야만 했고 (중략) 안희정의 범죄들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진했다”고 토로했다. 김지은씨의 이런 고백은 ‘피해자답지 않음’이 비정상이기는커녕 살기 위한 몸부림임을 설명한다.

요즘 한국 사회를 흔드는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위력에 의한 것들이다. 흔히 말하는 ‘윗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억울한 가해자가 발생해서도 안 되지만 상대적으로 약자인 피해자가 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명확한 진상규명 한편으로 ‘피해자다움’으로 규정된 행동의 범위에 관한 폭넓은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

예컨대 꼼짝없이 강간당할 위기에 놓인 여성이 임신이 두려워 가해자에게 콘돔 사용을 권하고 관계를 맺었다면 이를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의 공동 저자 한채윤은 “어떤 상황에서든 거부와 동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성적 자기결정권은 아니다”라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환경 내에서 거부와 동의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상은 느리지만 변화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대체로 처음으로 젠더문제에 대한 인식의 엷음을 인정하고 사과하지만 법정에서는 관련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사과는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반응이지 사실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태도이다. 하지만 최근 정의당 사태에서는 가해자인 당 대표가 기꺼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퇴했고, 피해자인 소속 의원은 ‘신속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선언하는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줬다. 성범죄에서 고려돼야 할 건 단순히 피해자다움이나 막연한 동의가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중되는 환경에서 진정한 동의가 있었는지를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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