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 해체한 장혜영...정의당의 ‘진짜’ 진보를 보여줬다
피해자다움 해체한 장혜영...정의당의 ‘진짜’ 진보를 보여줬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1.2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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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 정의당 의원. [사진=연합뉴스]
장혜영 정의당 의원. [사진=연합뉴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모든 행위에 성(性)이 붙으면 사건 파장의 정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단순 추문과 ‘성’추문에 쏠리는 비판의 정도와 강도가 다르고, 폭행과 ‘성’폭행은 형량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 폭행은 최고 징역 2년이지만, 성폭행은 징역 3년부터 시작된다. 다만 이런 처벌은 성범죄 혐의가 입증됐을 때의 이야기고,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처벌은 요원한 일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정절을 잃을 경우를 대비한 ‘은장도’가 존재했던 우리나라에서 성범죄 피해자는 엄격한 ‘피해자다움’의 검열을 통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일말의 ‘티끌’이라도 발견될 시에는 혹독한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성범죄는 성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시정잡배가 저지르는 범죄라는 관념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통념에 어긋나는 사례가 빈번하다. 누구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정치인, 그것도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사람들이 일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2018년에는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가 성폭행 혐의로 구속됐고, 지난해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를 받는 가운데 목숨을 잃었다. 오거돈 부산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시장직을 내려놨고, 최근에는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성추행 혐의로 대표직을 잃었다.

해당 사안의 가해자들이 두터운 지지층을 지닌 정치인이었던 만큼 피해자를 향한 피해자다움의 검증은 엄격했고, 2차 가해는 더욱 촘촘했다. 실제로 안 전 지사의 비서이자 피해자인 김지은씨는 피해 사실 폭로 이후 음모론, 정당 사주설, 국회의원 공천설, 여성단체 공모설 등 갖가지 의혹에 시달렸다. 그는 책 『김지은입니다』를 통해 “거짓 주장들이 온라인을 잠식했고 나는 인터넷 뉴스 창을 통해 그 거짓들과 마주해야 했다”며 “나는 여전히 가지고 놀기 좋은 사냥감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비서이자 피해자인 A씨 역시 2차 가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작 그깟 일로” “그 정도로 뭘”이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피해자’가 아닌 ‘피해호소인’으로 불리며 혐의를 입증할 ‘증거’ 제시를 강요받았다. 지난 4일 법원에서 사실상 박 전 시장의 혐의가 인정됐고, 지난 25일에는 인권위원회가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고 발표했지만, 친문(親文) 시민단체인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는 “(박 전 시장과 관련한 미투는) 미투를 가장한 정치공작이다. 박원순 시장님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반드시 진실을 밝혀 저들을 구속 수사하고 중형의 실형을 선고받게 해야 한다”며 피해자에 대한 고발을 예고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5일에는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돌연 성추행 혐의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피해자는 같은 당 장혜영 의원으로 “2차 가해가 두렵지만,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결정이었다”며 피해 사실을 스스로 밝히고 나섰다. 장 의원은 “이번 사건을 겪으며 깊이 깨달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다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어떤 여성이라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토로했다. 같은 날 배복주 정의당 젠더인권본부 부대표는 SNS를 통해 2차 피해에 관한 우려를 전하면서 “피해 사실은 가해자가 명백하게 인정한 성추행”이라며 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경찰 고소 없이 당 차원의 징계를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 정의당 성추행 사건으로 일각에서 ‘정의당 해산’ ‘장혜영 사퇴’ 등의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과거 사례와 비교하면 2차 가해의 화력은 상대적으로 현저히 약화된 모습이다. 피해자를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라는 댓글이 다수를 차지했다. ‘장혜영처럼’ 용기 있게 고백한 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잘못은 가해자가 한 것이지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을 우려하며 숨을 필요가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한 시민단체가 경찰에 정의당 성추행사건을 고발하자 오히려 장혜영 의원이 “원치도 않는 제3자의 고발을 통해 다시금 피해를 상기하고 설명하며 그 과정에서 수반될 2차 가해를 감당해야 하나”며 되받아친 것도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말하면서 실상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은 채 입맛대로 소비하는 행태에 염증을 느낀다”는 장 의원의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책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최성호는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은 간과된 채 획일적으로 요구되는 ‘피해자다움’은 가장 전형적인 성폭력 2차 피해이다. 특히 성폭력 수사·재판 담당자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통념에 의해 ‘(보호할 만한) 순수한 피해자상’에 부합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경우 의심하고 비난한다”며 “‘피해자다움’은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 형성된 ‘합리성’이나 ‘객관성’의 이름으로,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어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며, 무엇보다 피해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세상에 ‘당해도 싼’ 성범죄 피해자는 없다. 당연히 ‘피해자다움’을 이유로 한 2차 가해도 존재해선 안 될 일이다. 이번 정의당 사건은 지난 몇 년간의 초대형 성추행사건에도 불구하고 젠더 문제에 대한 남성들의 구태의연함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재삼 입증했지만, 그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변화상은 우리 사회가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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