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히가시노 게이고의 졸작?
[니가 사는 그책] 히가시노 게이고의 졸작?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1.01.06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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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지난해 말 전 세계 동시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소설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이 대형서점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런데 이번 인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전 세계 동시 출간’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기인한 반짝인기로 보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들만큼 재미있지 않다는 평이 적지 않다. 

소설은 주인공 가미오 마요가 아버지 가미오 에이치가 살해됐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에이치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은퇴 교사, 그가 집 서재에서 무언가에 목이 졸려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마요가 집에 도착해 마주한 것은 어질러진 서재와 경찰만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연을 끊고 살았던 삼촌(가미오 다케시)을 수십 년 만에 만나게 된다. 과거 미국에서 유명 마술사(블랙 쇼맨)였던 삼촌은 속임수와 뛰어난 추리력을 이용해 사건을 풀어나간다. 

소설의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 서사적 관점에서 이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후더닛’(일종의 서사 기법, 영어로 Who has done it? 즉, 누가 저질렀느냐?)이다. 즉, 독자는 ‘범인 찾기’라는 큰 줄기에서 발생하는 연속적인 의심과 그 의심의 해소를 즐기게 된다. 소설에서 의심을 사는 이들은 대부분 에이치의 옛 제자들. 그런데 작가가 독자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 의심을 해소하는 방식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에이치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하라구치 고헤이를 시작으로 마요의 친구 혼마 모모코, 모모코의 남편이자 에이치를 은사(恩師)로 여기는 이케나가 료스케, 지역 유력 건설사의 부사장 가시와기 고다이, 지방 은행에서 근무하는 마키하라, 음식점을 경영하는 누마카와, 졸업 후에도 에이치와 꾸준히 연락을 이어온 모리와키 아쓰미 등이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에이치가 사망하기 며칠 전 그와 연락했거나, 에이치를 살해할 만한 일말의 동기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대부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얽혀 있었다. 모모코와 그의 남편 료스케가 에이치와 연락한 이유는 부부싸움 때문이었다. 코로나19로 다니던 여행사가 파산하고 모모코는 직장을 잃는다. 료스케는 회사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대규모 리조트 사업이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되는 일을 겪게 된다. 상황이 나빠지자 둘은 크게 싸우고, 급기야 별거하게 된다. 사업가인 고다이와 은행원인 마키하라는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에 지역 활성화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업을 홍보하고 투자를 유치했으나 코로나19로 사업이 엎어지자 투자자들에게 투자금 일부를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투자자 중에는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한 아쓰미의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의 통장에 투자금이 아예 들어오지 않은 것을 발견한 아쓰미가 에이치에게 연락하고, 그로 인해 고다이와 마키하라가 에이치의 살해 용의자로 의심을 산다.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을 가족에게 상속하기보다는 마을 활성화에 쓰고 싶어 했던 아쓰미 아버지의 유지(遺志)가 소설의 절정부에서 밝혀지면서 이러한 의심은 해소된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은 코로나19라는 상황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유로 의심을 받고, 그 의심은 비교적 싱겁게 해소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배경으로 그 상황에 맞는 사건들을 고르다보니 스토리가 평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독자를 더욱 김빠지게 하는 것은 진범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뭇 미스터리 스릴러가 그러하듯, 진범은 결코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지 않게 묘사되던 인물로 밝혀진다. 에이치로 인해 과거 자신이 한 거짓말이 드러날까 두려워 에이치를 살해했다는 그 살해 동기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 진부해진 지 오래된 스토리다.   

서술이 장황하다는 점도 이 책을 다 읽기 힘들게 만든다. 가령 “다케시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식욕이 없었지만, 메뉴를 보니 먹을 수 있을 만한 게 있어서 도로로 소바(마를 갈아 넣은 메밀국수)를 골랐다.” “다케시는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남색 유리병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마개를 뽑아 맥주를 따라 마요 앞에 놓았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마요는 숨을 삼켰다. 풍부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같은, 겉치레 문장들이 꽤 있다.  

특히 소설에서 ‘코로나’라는 단어는 모두 71번 등장하며, 코로나19 확산세와 그로 인한 정부 지침 따위와 관련한 문장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마치 코로나19 관련 기사를 소설에 그대로 넣은 듯해, 독자는 소설이 아닌 신문을 읽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장황한 서사를 걷어내면 사실상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30분짜리 에피소드 한 편으로 축약될 수 있는 소설인데도, 독자는 이 소설을 읽기 위해 많게는 며칠을 투자하며 지쳐간다.    

혹자는 ‘마술 트릭’으로 남을 기만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다케시가 매력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러한 주인공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 드물지 않다. 다케시와 가장 비슷한 주인공을 꼽으라면 지난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CBS에서 방영한 인기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패트릭 제인이 있다. 그 역시 마술사 출신이며, 사건을 풀어내는 방법뿐 아니라 의뭉스러운 성격까지 다케시와 유사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일본 소설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박힌 소설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기 마련이다. 물론 그의 많은 소설들은 그 재미를 인정받았지만, 몇몇 작품은 그의 평판을 의심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읽지 못한 책들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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