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 백석 「나 취했노라」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사람이여
날 위해 슬픔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내 머리맡에 장미로 심지 마세요
내 위에 푸른 잔디를 퍼지게 하여
비와 이슬에 젖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음이 내키시면 기억해주세요.
나는 사물의 그늘도 보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리다.
슬픔에 잠긴 양 계속해서 울고 있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리다.
날이 새거나 날이 저무는 일 없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꿈꾸며
아마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니, 잊을지도 모릅니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노래 - 내가 죽거든」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 「십자가」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윤동주 외 32명 지음 | 칼 라르손·클로드 모네·에곤 실레 그림 | 저녁달고양이 펴냄│280쪽│1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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