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데이트 폭력... 한 대가 두 대, 두 대가 살인 된다
가정·데이트 폭력... 한 대가 두 대, 두 대가 살인 된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0.11.18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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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내가 곧 떠날 걸 예감한 마티아스(동거남)가 유화 나이프를 던졌는데, 원래대로라면 몸에 맞고 떨어지는 게 정상이지만 하필 오래 써서 날카로워진 물건인데다 각도가 맞아드는 바람에 팔에 꽂히고 말았다.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中

(남편이 아내의) 뺨을 올려붙였다. 그때부터 폭력이 시작된다. 강간이 수반된다. (아내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중략) 폭력과 강간이 벌어졌다 – 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中

인간사를 농축시켜 놓은 소설에는 수많은 가정·데이트 폭력이 존재하고, 그만큼 현실에서도 가정·데이트폭력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실제로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월 발표한 「2019 분노게이지의 통계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친밀한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 피해·살인미수자는 229명으로, 그중 이혼·결별을 요구해 살해된 여성은 58명(29.6%)에 달한다.

그럼 폭력 가해자의 대다수는 남성이냐? 그건 아니다.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이 경기도의 만19~64세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데이트폭력 실태조사(2018)’에 따르면 데이트폭력(신체·성폭력)을 경험한 여성 비율은 55.4%로, 남성 비율(54.5%)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하여 이 연구를 진행한 연구원 관계자는 “다른 조사에 비해 (남성의) 데이트폭력 피해 경험 비율이 낮게 나온 이유는 (주로 여성들이 하는) 상대방 휴대폰 점검, 옷차림 간섭, 모임 활동 제한 등과 같은 행동 통제 유형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본래 데이트폭력은 신체·정서·성적 폭력을 포괄해 측정하는데, 여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은 정서적 항목이 조사에서 제외돼 여성의 데이트폭력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측정됐다는 말이다.

또한 서경현 삼육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논문 「집착 성향과 대학생의 데이트폭력 간의 관계」에서 “만18~25세 사이 남성 150명과 여성 140명 등 남녀 대학생 290명을 조사한 결과 연인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 비율은 여성이 58%, 남성이 31.4%로 오히려 여성에게서 더 높은 수치가 나왔다”며 “데이트폭력 가해를 남성이 더 많이 할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미국에서 수행된 연구 중에는 데이트폭력에 성차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역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성폭력 상담소에 (남성 피해자를 응대할) 남자 상담원이 존재할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며 “남성이라고 해도 피해를 보면 경찰에 신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한 20대 여성이 자신과 사귀기 전 자신의 지인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 허벅지를 라이터로 지지는 등의 폭력을 가해 1심에서 징역형(10개월)을 받았고, 같은 달 다른 여성은 SNS에 다른 여성의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쇠 파이프로 가격한 후 흉기를 휘둘러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10월에는 30대 여배우가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차를 타고 남자친구에게 돌진해 위협하고, 이후 남자친구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폭행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처분을 받기도 했다.

결국 폭력에 대한 피해 비율은 남성과 여성이 비슷하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여성의 피해가 두드러져 보이는 건 왜일까? 전문가들은 남성보다 여성의 피해 후유증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기도의 데이트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이후 ▲사회생활 및 대인관계(남 11%, 여 12.5%) ▲알코올 중독(남 2.6%, 여 2.8%) ▲섭식장애(남 3.5%, 여 8.7%) ▲정신적 고통(남 22.9%, 여 30.6%) 부문에서 여성의 고통 총량이 남성보다 높게 측정됐다. 또 성별 간 힘의 차이도 여성의 피해를 높이는 이유 중 하나인데, 실제로 최근 부산의 어느 지하차도에서 발생한 데이트폭력 사건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서로 격렬하게 치고받았지만, 힘에서 밀린 여성이 먼저 의식을 잃었고 결국 더 크고 많은 상처를 입었다.

위 내용을 종합해보면 데이트 폭력의 발생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보다는 개개인의 폭력 성향 유무에 달려있다. 따라서 데이트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대의 성향에 주의해야 하는데, 사실 처음부터 그런 성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이런 성향은 쉽게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재범률(76%)이 높아 위급 상황 시 그런 전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이유에서 영국은 위급 상황 시 애인의 폭력 전과를 확인할 수 있는 ‘클레어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논의 단계에 머문 상태다. 그사이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증가세(2017년 1만4,136건, 2018년 1만8,671건, 2019년 1만9,940건)를 보이고 있는데, 지난해에만 7,003건의 폭행, 1,067건의 감금·협박, 1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인 이아리 작가는 책 『다 이아리』에서 “내게는 평생 남을 끔찍한 기억이 그에겐 찰나의 실수일 뿐이다. 용서를 해주면 그는 면죄부를 받는다. 폭력이 반복될수록 면죄부는 쌓이고 쌓여 그에게 단단한 방패를 쥐여주고, 더 큰 위협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든다”며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독한 방식으로 알게 됐다. 나로 인해 상대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달콤한 상상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정세랑 작가는 『시선으로부터,』에서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대가 두 대가 되고, 두 대가 끝내 날 선 비수가 돼 인격을, 존재를 파괴할 수 있다. 그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개인이 못하면 사회가 끊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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