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 “공감과 정감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인터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 “공감과 정감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11.16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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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 감독 [사진=안경선 PD]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0년대에 발생했던 ‘페놀 유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한국은 87년 민주화를 거치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며 ‘세계화’를 외치고 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곳에서는 몰래 ‘검은 물’을 국민들의 삶으로 쏟아 부었던 비열하고 잔인한 시간이었다. 영화는 바로 이 모순적인 시간의 풍경을 여성노동자들의 발자취를 통해 흥미롭게 묘파하고 있다.

장르적으로 접근하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노동영화이자 청춘영화의 특징을 보인다. 성차별적인 근무환경 속에서도 직업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고자 하는 고졸 말단 여성노동자들의 고군분투와 자기인식 과정을 코미디로 유려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감각적인 노동영화이며, 여성노동자들이 그러한 문제적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연대의 가치를 자각하며, 한 단계 성장한다는 점에서 청춘영화의 결을 갖기도 한다.

영화를 연출한 이종필 감독은 다소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재기 발랄한 코미디로 녹여냄으로써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중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90년대의 정서와 풍경을 경유해 ‘젠더’와 ‘공정’ 등 동시대인들이 주목하는 소재들을 균형감 있게 풀어내며 불편과 혐오가 없는, 착한 대중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관객의 일상을 무해한 방식으로 위로할 줄 아는 영화. <독서신문> 사옥에서 이종필 감독을 만나 영화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Q. 영화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고 있다. 소감이 궁금하다.

A. 아직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서 흥행했다고 단정하긴 이르지만 체감적으로는 많은 관객분들이 영화를 괜찮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Q. 기억에 남는 관객의 반응이 있다면?

A. 영화를 좋게 봐주신 분들 혹은 비판적인 의견을 주신 분들의 반응을 다 읽고 있다. 근데 영화의 만듦새에 관한 평가보다는 관객들의 실질적인 반응이 더 기억에 남는다. 가령 어떤 관객분이 어머니랑 같이 봤는데, 어머니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저 인물들과 내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사연이 자기 얘기 같다는 것. 약간 다른 얘기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관한 독자의 평 중에 “소설을 읽고 남자친구가 보고 싶어서 밤에 뛰어나갔다”라는 감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는데, 그런 맥락인 것 같다.

Q. 영화는 1990년대에 일어난 ‘페놀 유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당위성 같은 게 있었는지?

A. 영화 초고 시나리오가 있었다. 초고를 쓰신 작가님이 실제로 90년대 모 기업에서 영화 설정과 똑같이 고졸 사원을 대상으로 토익 강의를 하셨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셨는데, 그 초고에 ‘페놀 유출’ 사건이 있었다. 다만 초고에 있는 건 2008년에 일어난 비슷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작가님이 이 사건을 어떻게 작품으로 끌고 들어왔는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나는 다만 그 초고를 각색하고 연출하는 입장에서 페놀 유출이 크게 일어났던 90년대로 시대적 배경을 옮겼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70~80년대를 야만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럼 90년대는 뭔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90년대가 그렇게 희망찬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도, 독재도 끝났는데 여전히 어떤 어두운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는 시대.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필요했다.

Q. 영화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어 장르적으로 ‘노동영화’의 특성을 보인다. 동시에 세 여성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청춘영화’의 결을 따라가기도 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참고가 된 영화가 있을까?

A. 청춘영화로서는 정재은 감독님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를 참고했다. 노동영화로서는 영화아카데미 졸업 단편 중에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2005)가 있다. 가리봉동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 이야기다. 하지만 공장이 나오진 않고, 주인공이 오랫동안 머문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핵심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라는 마음이다. 이 영화는 어느 여성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일상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라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그 부분이 좋았다. 수많은 노동영화가 있지만 그 영화가 자꾸만 생각났다.

Q. 노동영화는 소재 자체의 특성 때문에 관객이 장르적으로 즐기기가 어렵다. 고단한 현실의 문제를 영화에서까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관객의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투자자들 역시 대부분 기업이라 소위 기업을 ‘악’으로 규정하는 노동영화에 투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기획이나 제작 단계에서의 어려움 같은 건 없었나?

A. 전혀 없었다. 놀랍게도 이게 대기업 영화인데, 투자와 관련한 분들도 이 이야기에 깊이 공감해주셨다. 반(反)기업정서는 특별히 없었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작사 대표님이 일을 잘 한 것으로 안다. (웃음) 그저 나는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으로서 이 이야기를 대중영화의 호흡으로 풀어내는 게 중요했다.

이종필 감독 [사진=안경선 PD]

Q. 대부분의 노동영화는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근로조건을 고발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어둡고 딱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고발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기존 노동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나 여성노동자가 처한 삶을 밝고 경쾌한 코미디로 풀어냈다.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연출의 포인트가 있다면?

A. 기조는 정했다.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는 것. 재미가 있어야지 이런 얘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객들이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페놀 유출로 인한 피해자 마을이 등장하고, 그 마을 사람들을 다루는 부분에는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영화에 넣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에 일이 다 해결되고 직원들이 피해자를 찾아가서 대화 나누는 장면을 찍었는데, 결론적으로 넣지 않았다. 실제 사건을 다룬 것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다는 인상 밖에 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영화 전체 흐름에 맞게 뺐다.

이 영화의 순기능이라고 한다면 사건 자체를 깊이 파헤치고 있진 않지만 영화를 통해서 90년대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문제를 관객들에게 전달했다는 데 있다. 다만 그걸 대중영화에 담는 데 있어서 연출방식이 너무 가볍지 않느냐라는 비판에 관해선 나도 동의를 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사건을 끌어올 때, 그 사건에 관해 책임감을 느끼지만 영화의 호흡을 위해서 어떤 장면들은 뺄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대중영화를 찍는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부분이 묘한 딜레마 같은 것이다.

Q. 영화에는 상당히 많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지만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가 거의 없고,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제몫을 해낸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인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의 호흡이 일품이다. 각각의 배우에게 특별히 주문한 연기 디렉팅은 무엇이었나?

A. 없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작업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배우에게 구체적인 연기 디렉팅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극히 일부분이다. 그냥 같이 고민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떤가?’라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나눈다. 가령 대사가 불편하지는 않느냐 혹은 어떤 호흡이 편한지 배우에게 많이 물어보고 서로 대화한다. 영화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지 감독이 배우에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줘”라는 건 없다.

그리고 소비되는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라는 건 내 목표 중 하나였다. 좋은 영화는 단역들이 다 살아있다. 그러니까 배우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분량에 관계없이 모든 배우들이 자기 연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내가 잘 했다기보다는, 사실 그게 정상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 자체도 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상적인 일을 하는 얘기니까. 연출 태도도 그렇게 가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Q. 그럼 배우가 먼저 제안해서 완성된 인상적인 연기가 있다면?

A. ‘자영’ 역을 맡은 고아성 배우가 내부 고발에 실패한 뒤에 왕따처럼 복도 책상에 앉아서 벽을 멍하니 보는 장면이 있다. 근데 거기서 고아성 배우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굉장히 진지하게 연기해서 놀랐다. 그러니까 감독은 상황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배우는 그 상황에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감독이 알지 못하는 걸 배우만 알고 있는 부분이 그런 연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 순간의 감정이라는 건 배우만 아는 거니까. 그때 감독은 배우로부터 떨어져서 ‘음, 그렇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Q. 개인적으로는 마케팅팀 ‘반 부장’ 역의 배해선 배우의 연기가 도드라져보였다.

A. 배해선 선배의 경우엔 자기 역할에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접근하신 게 있다. 촬영 전에 따로 만나서 길게 얘기했었고, 마케팅팀 전체가 모여서 회의하는 걸 연극 연습하듯이 해봤다.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는데?”라는 대사도 배해선 선배가 만든 대사다.

이종필 감독,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Q. 동시대 한국영화 중에 특히 ‘페미니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남성을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아 개봉하기도 전에 일부 관객들의 공격을 받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남녀 대결의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는 태도를 취한다. 이 부분에 관한 감독의 연출적 고민이 분명 있었을 것 같다.

A.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정해버리면 재미가 없다. 배우 입장에서는 연기하는 맛도 안 난다. 가치 판단은 보는 사람이 하는 거다. 나는 그 판단을 최대한 하지 않고, 실제 저 상황에서 저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만 생각한다.

Q.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특히 자영이 ‘어항 속의 금붕어’를 풀어주기 위해 냇가에 갔다가 회사 공장의 페놀 유출로 인해 죽은 물고기 떼를 발견하는 전후의 장면들이 그러한데, 이것이 결국 그 시대 여성노동자들의 처한 존재론적 상황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A. 사실 그런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자영이 어쩌다가 회사 공장의 하천까지 가서 페놀 유출을 보게 됐는가가 중요했다. 그걸 네 달 동안 고민했다. 그러니까 서울 을지로 본사에 있는 자영이 지방 공장에 가서 어쩌다가 페놀이 유출되는 걸 보게 됐는가, 그런 상황을 설계하는 게 중요했다. 자영이 그걸 목격하게 하기 위해서 ‘최 대리’(조현철)와 ‘오 상무’(백현진) 캐릭터가 필요했다. 자영이 오 상무의 짐을 가지러 최 대리와 함께 지방 공장에 갔는데, ‘그럼 이제 하천까지는 또 어떻게 보내지?’라는 생각이 든 거다. 그때 문득 금붕어 한 마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 여러 가지 상황이 연쇄적으로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Q.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A. 노동영화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어쭙잖게 프로파간다적으로 가느니 다소 판타지일지언정 희망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단체로 출근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그 장면이 보고 싶어서 이 영화를 시작했다. 근데 이 장면을 찍을 때 고아성 배우가 카메라를 보면서 미묘하게 웃는 거다. 내가 디렉팅한 게 아니었고, 배우 스스로 그렇게 했다. 근데 실제로 그때 모니터를 보면서 배우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타이밍에 고아성 배우가 웃어서 무척 놀랐다.

Q. 배우와 텔레파시가 통한 거 같은데, 그런 순간을 현장에서 마주하면 기분이 어떤가?

A. 좋긴 한데, 내가 욕심이 끝이 없어서… 속으로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배우가 실제로 웃으면 ‘웃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웃음)

Q. 차기작에 관한 구상이 궁금하다.

A.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 무슨 영화를 찍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강렬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현재는 그 정도까지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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