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장벽으로 본 권력의 이동과 세계 질서 『장벽의 문명사』
[책 속 명문장] 장벽으로 본 권력의 이동과 세계 질서 『장벽의 문명사』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11.11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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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문명의 역사에서 벽은 얼마나 중요했을까? 문명인 가운데 장벽 밖에서 살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원전 1만 년 무렵에 예리코를 건설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였던 그들의 도시 주변에 방어물을 쌓았다. 시간이 가면서 도시화와 농업이 예리코와 레반트 지역에서 새로운 영토로 퍼져나갔다. 곧 아나톨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발칸 그리고 그 너머로 확산됐다. 그리고 예외 없이 장벽이 그 뒤를 따랐다. 농부들은 어디에 정착하든 그들의 마을을 요새화했다. 그들은 터를 돋우고 집 둘레에 도랑을 파서 봉쇄했다. 공동체 전체가 마을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열중했다. 선사시대 트란실바니아의 농촌에 관한 연구는 마을 주변의 호를 파기 위해 1만4,000세제곱미터에서 1만5,000세제곱미터 사이의 흙을 운반해야 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성인 남성 60명이 40일 동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호 주변에 돌을 쌓아 두르거나 울타리를 만들어 보강했다. 공동체가 충분히 오래 유지되면 그들은 측면을 방어하기 위한 망루를 추가했다. 이런 것들이 장벽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다. 

최초로 문명을 건설한 이들은 벽을 쌓은 이들의 후예였다. 그들은 조직과 수에서 새로 확인한 장점을 활용해 더 큰 장벽을 쌓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략) 무엇이 두려워 벽을 쌓았을까? 문명(그리고 벽)을 만든 사람들은 특별히 겁이 많은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문명을 건설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두려움이 더 커졌을까? 이런 물음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중략)

로마인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전투에 다른 사람을 동원해 싸우게 하기를 즐겼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결정적인 문명 전파자가 됐을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이 위용을 잃게 했다는 상투적인 불평의 대상이 됐다. 도시 성벽과 이방인 수비대 뒤에서 안전해진 로마인들은 점점 더 유약해졌다. 그들은 정치가였고 철학자였고 제빵사였고 대장장이였다. 전사를 뺀 모든 직업에 종사했다. (중략)

장벽의 탄생으로 인간 사회는 저마다 다른 길로 향했다. 자아도취의 시로 향하는 길을 택한 사회가 있었는가 하면 과묵한 군사주의로 향하는 길을 택한 사회도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길은 훨씬 더 많은 다른 길(과학, 수학, 연극, 미술)로 이어졌다. 반면에 나머지 길은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 길에서 남성은 오직 전사여야 했고, 모든 노동은 여성에게 전가됐다. <23~28쪽>

『장벽의 문명사』
데이비드 프라이 지음│김지혜 옮김│민음사 펴냄│408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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