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남해보다 더 아름다운 시는 보지 못하리!"… 고두현의 '남해 연가' 

2020-06-03     서믿음 기자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인 고두현 시인의 작품 중 남해를 테마로 삼은 시를 선별해 엮은 시 선집이다. 주목할 점은 독자들의 열렬한 요청으로 기획됐다는 점. 시인은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남해 가는 길-유배시첩」으로 데뷔한 이래 꾸준히 남해를 모티프로 시를 써왔는데, 그 향유에 매료된 독자들의 요청이 이어져 남해만을 주제로한 시 선집이 탄생하게 됐다. 물결 낮은 은점마을, 남해 치자, 다랭이마을, 물미해안 등 남해가 쓰고 시인이 받아 적은 아름다운 시들이 한가득 담겼다. 

[사진=남해군]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중략)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 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척이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33쪽> 

「마음의 액자-다랭이마을에서」

멀리 있는 것이 작아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커 보이는/ 원근법의 원리 이미 배웠지만/ 세상 안팎 두루 재 보면/ 눈에 멀수록 더 가깝고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요/ 오늘처럼/ 멀리 있는 당신 (중략) 어느 날 문득 내게로 오는 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유리 거울이라면/ 끊임없이 가 닿기 위해/ 나를 벗고 비우는 일이/ 원근보다 더 애달픈 사랑이라는 걸/ 마음의 액자 속에서/ 비로소 깨달은 오늘 <41쪽>  

남해

「노도의 봄-유배시첩」

이제 초옥을 떠나야겠다/ 탱자나무 울타리 헤치고/ 허리등배미 기슭 따라/ 뭍으로 가야겠다// 앵강만 물비늘 타고/ 봄빛 짙어오니/ 엉겅퀴 억새 뿌리/ 더운 피 도는구나/ (중략) 이제 구운몽을 다시 쓰자/ 노지나묘등은 내 집이 아니다/ 한 삼백 년 지난 뒤엔/ 사씨남정기도 잊히리라// 효성 바칠 어머니도/ 유배 간 조카들도/ 모두 떠난 봄 바다에/ 무엇을 기다리리// 용문사 대나무숲/ 통째로 메고 가자/ 해풍에 뒤틀린 솔도/ 등걸째 업고 가자// 성진아 저 큰 바다/ 힘차게 노 저어라/ 살아 다시 못 디딘 땅 <75쪽> 

창선교와

「남해 멸치-지족 죽방렴에서」

너에게/ 가려고 그리/ 파닥파닥/ 꼬리 치다가/ 속 다 비치는 맨몸으로/ 목구멍 뜨겁게 타고 넘는데/ 뒤늦게 아차, 벗어 둔 옷 챙기는 순간/ 네 입술 네 손끝에서/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오 아름다운 비늘들// 죽어서야 빛나는/ 생애. <133쪽> 


『남해, 바다를 걷다』
고두현 지음 | 민음사 펴냄│164쪽│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