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그림이 품은 일상 속 특별한 이야기 『마음은 파도친다』

2020-02-19     서믿음 기자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그림치료를 공부하다 그림에 매료돼 그림책 작가가 된 저자. 그의 그림 속에서는 더운 숨을 쉬는 생명들이 살고 있다. 길에서 만난 개와 고양이, 텃밭의 작은 식물들, 같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실향민 구순 아버지의 꿈까지. 

때론 그림이 글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형상 하나하나가 그린이의 세계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펜, 연필, 흑연, 목탄, 붓펜, 먹, 크레파스, 색연필, 파스텔, 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로 탄생한 그림은 창작, 사람다움, 생명다움, 행복, 권리 등의 세계관을 품어 낸다. 

가을이 보내는 손편지 같은 낙엽. 바람에 나뭇잎들이 앞 다투어 떨어질 때는 머리칼이며 어꺠에 붙은 잎들을 함부로 떼어내지 못하고,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잎들을 밝기가 미안해 빈 자리만 골라 딛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도시에서 만나는 자연. 그 ㅅ흔하고 아름다운 낙엽들을 그리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알록달록 채색 연습에도 좋다. 그런데 상한 데 없이 말쑥한 잎보다 벌레 먹은 것처럼 흠 있는 잎사귀에 더 끌리는 것은 왜일까. <22쪽> 

하루 종일 묶여 있는 모습이 짠해서 몇 번인가 내가 줄을 잡고 농장을 산책시킨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사방팔방으로 내달리려는 녀석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아주 그냥 자유에 취해가지고 남의 텃밭 채소도 막 짓밟고 말이야! 정신을 좀 차리시고는 방금 물을 준 우리 밭 상춧잎에 맺혀 있는 물방울을 고 작은 분홍 혀로 맛나게 핥아먹었지. 자전거를 타고 텃밭을 떠날 때면, 그런 나를 언제나 물끄러미 지켜보던 녀석. 어느 저녁 무렵에 해 지는 쪽으로 돌아낮아 있던 어린 너의 두시모습이 아직도 내 가슴에 콱 박혀 있단다. 보고 싶다, 죠스야. <82~83쪽> 

일본 그림책 『희망의 목장』은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한 뒤 방사능이 흐르는 목장에 눌러앉아 남겨진 소들을 돌보는 사람의 감동 실화를 전한다. 이 책에 고양이가 두 번 등장한다. 표지에 그려진 고양이는 주인 옆에 소, 개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인데 다른 동물들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동그란 두 눈으로 노란 나비를 쫓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고양이는 내가 따라 그린, 딱 이 그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탁자에 몸을 뒤집듯 누워 세상 편하게 잠들어 있는 고양이.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술 한 잔 걸치시는 소치기 아저씨 곁에서 근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천진난만한 자태로 널브러져 자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세상 태평한 너한테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86쪽> 

너는 내가 모르는 아이. 누나 따라 온 미장원에서 누나가 머리를 하는 동안 의자를 타고 오르며 잘도 놀더니 어느 순간 이렇게 잠이 들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발을 벗고 소파에 올라가 고단한 몸을 뉘셨네. 한여름 에어컨 바람이 센지 작다란 몸을 더 웅크렸다. 내가 머리할 차례를 기다리며 얼른 너를 그린다. 네 누나, 머리 거의 끝나간다. 너 깨어나기 전에 진정한 평화의 사도 같은 너의 모습을 마저 그려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부여된 과제! 내 손은 바쁘고 기쁘다. <132쪽> 


『마음은 파도친다』
유현미 지음 | 가지 펴냄│208쪽│15,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