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문자 속으로 걸어가다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2019-08-19     송석주 기자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외국의 공항에 내리는 순간은 일상의 자동 조종 장치가 꺼지는 순간이다.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은 이제 없다. 대신 다른 리듬과 호흡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독할 수 없는 문자와 언어 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나는 내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13쪽>

끔찍하기는 하지만 악몽에도 좋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공평함이다. 세금과 달리 악몽은 공평하다. 악몽은 나이나 지위,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가기 때문이다. 막상 이렇게 써놓고 보니 악몽이 그렇게 공평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세상의 악한들과 학살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에게 악몽의 누진제가 적용되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국세청은 속일 수 있지만 악몽은 따돌릴 수 없다.<77쪽>

인간은 ‘말’과 ‘음식’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분류하고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어떤 것을 먹으려는 사람과 먹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 어떤 것을 먹이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먹지 않으려는 사람들. 먹을 수 있는 공간과 먹을 수 없는 공간, 나와 같이 음식을 나누는 자와 나와 같이 나누지 않는 자. 같이 음식을 먹고 싶은 자와 먹기 싫은 자 등등. 이런 분류와 명명은 모두 언어로 이루어진다.<98쪽>

어떤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과 생각들을 같이 끌고 온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자신만의 우주를 끌고 와서 길 위에 그것들을 포개놓는다. 그렇게 그 길은 각자에게 모두 다른 길이 된다.<174쪽>

박물관, 특히 국가가 만든 박물관의 기능 중 하나는 관람객들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박물관의 거대함을 알리는 데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거대함은 단순히 박물관의 규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박물관을 지은 상상의 공동체(국가)의 거대함과 위대함을 보여준다. 이 원리는 중국의 상하이박물관이든,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든,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든 다 똑같다.<217쪽>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백승주 지음 | 은행나무 펴냄│252쪽│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