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당신의 심장을 뜨겁게 할 명시와 시인의 이야기

2018-12-13     김승일 기자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멈출 때마다 나는 듣네.’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명구를 필사하다가 이 대목에서 한참 머물렀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멈출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정신없이 쫓기면서 숨 고를 시간마저 없었구나. 광속(光速)의 세태에 휩쓸려 생의 의미도 생각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그날 겨울 속에서 낯선 나를 발견하고는 오래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얼 위해 이토록 아등바등 살았는가. 시인들은 왜 “일에 쫓겨 허덕거릴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곁을 둘러보라”고 했을까. <4쪽>

영화 ‘닥터 지바고’의 명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설원, 연기를 내뿜으며 눈 덮인 철길을 헤치고 달리는 기차, 끝 간 데 모를 자작나무 숲, 유리창에 낀 두꺼운 성에, 지바고의 얼굴에 매달린 고드름…. 
유리 지바고 역할을 맡은 오마 샤리프의 오묘한 눈빛은 또 어떤가. 우수를 가득 머금은 눈, 비밀경찰에 쫓기는 초조한 눈, 라라를 그리는 애잔한 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은 연민의 눈까지 ‘천 개의 눈동자’가 어른거린다. <119쪽>

내가 자란 남해는 섬이어서 쌀도 귀하고 돈도 귀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객지 공부를 시키면서 어머니의 발톱은 얼마나 많이 닳았을까. 삶의 끝자락에 누우신 뒤 처음으로 편한 잠 주무시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나는 병실 창가에 오래 서 있었다. 무연히 콧등이 시큰해져 고개를 들었다 다시 내려다보니 아, 무슨 꿈을 꾸는지 어머니가 가뭇가뭇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다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햇살을 받아 눈부신 두 발이 옛집 마당가의 분꽃보다 더 희고 고왔다. 
그때 병실에서 쓴 시가 ‘참 예쁜 발’이다. <249쪽>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고두현 지음|쌤앤파커스 펴냄|264쪽|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