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타샤를 기다리는 겨울

2018-10-04     독서신문
방재홍

‘판문점의 봄’은 분명 강한 메시지였다. 한반도의 통일 기운을 싹틔우는 중요한 현대사의 변곡점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메시지 이상 실천은 많은 것을 요구하고 담보하기에 정작 열매는 언제 열릴지 장담할 수 없다. 아니 4월 당시 봄기운은 장대한 청사진을 온 국민 앞에 당당히 펼칠 것만 같더니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데 결실은 없다. 없다는 표현이 야박한지는 몰라도 봄기운의 여세가 확연히 꺾인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봄을 말한 시 중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만큼 대중적인 게 없을 것 같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대목은 중고교 시절 줄줄 외우던 구절 아닌가. ‘나 보기가 역겨워’라는 대목은 차라리 무저항이요 순종이다. 그러기에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고 가시는 길에는 꽃까지 뿌려준다 하지 않았나.

판문점의 봄은 아마 일부에선 북으로 가는 꽃길, 꽃을 즈려밟고 가는 남북의 길을 성급하게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기대에 차고 성급하게 보이는 후속 조치들은 우리 정부가 조급하게 꽃길을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김소월 고향(정확하게는 근처)은 영변이고 하필 영변에 핵시설이 있으며 왜 하필 영변 약산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하는가. 수십 년을 건너뛴 아이러니다.

‘평양의 가을’이 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이미 구면이라 만나면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백두산 등정이라는 깜짝 이벤트도 만들었다.

전문가들 표현을 빌리면 이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 역할은 끝난 것 같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적 쌓기에 열 올리는 트럼프와 비핵화 시간표를 ‘밀당’하는 김정은의 회담이 이제 한반도 운명을 가를 것 같다. 미국 측 설명대로라면 10월 이후 연내 언제쯤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워싱턴의 겨울’쯤 될 것 같다.

천재 시인 백석은 1938년 겨울 눈이 내리는 가운데 여인 나타샤를 열망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탸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고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노래하고 있다.

판문점의 봄은 평양의 가을을 지나 워싱턴의 겨울로 넘어가고 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은 속절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흰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밤에 아마 나타샤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함경도 사내’ 시인 이용악은 「하나씩의 별」에서 두만강 저쪽에서 오는 사람들과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이 함께 화물열차 지붕에 누워 한결같이 하나씩의 별을 바라본다고 했다. 해방 전후 누구나 바라보는 별은 이처럼 같았다.

눈이 그치고 나타샤와 함께 흰 당나귀 타고 하나씩의 별을 바라보는 날이 올까. 바람은 점차 차가워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