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이 곧 행복? 고통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2022-07-18     안지섭 기자

우리는 쾌락은 좋은 것, 고통은 나쁜 것으로 여긴다. 고통스러운 것을 찾아다니고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마조히스트’로, 특이 취향이거나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달콤한 고통’이라는 말은 문학적 표현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기준에서 고통은 쾌락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단어다. 당연히 고통을 달콤하게 여기는 삶도 좋은 삶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책 『최선의 고통』의 저자 폴 블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인간에게는 고통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성향도 있다며 자신이 자처한 고통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 주변에는 꼭 변태적인 성향을 갖고 있지 않아도 고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위험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고, 총알이 빗발치는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성심성의껏 남을 도우면서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 말이다. 행복은 쾌락에서 온다고 생각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사람들도 쾌락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때의 쾌락은 그들이 변태여서도, 고생이 끝나고 찾아온 보상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난은 그 자체로 쾌락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심리 구조를 잠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책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마조히즘의 일종인 ‘양성 피학증’을 갖고 있다. 양성 피학증이란 특정 유형의 자발적 고통과 고난을 이르는 말이다. 이를테면 공포 영화를 비명을 지르면서 본다든가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구는 행동이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런 행동을 하는데, 이는 사실 우리 몸이 잠깐의 고통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쾌락과 고통은 대조적인 개념이 아니며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너무 소소하고 일상적인 고통의 예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주변에도 고생을 자처하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부모들이다. 흔히 사람들은 아이를 갖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만 인간의 행복이 쾌락에 있다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육아는 실수나 다름 없다. 부모로 지내는 일상적 경험은 거의 쾌락을 안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가 어릴 때는 금전적 어려움, 수면 부족,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책에 따르면 아이는 부부 싸움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도 한다.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더 행복한 삶과 결혼 생활을 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다수의 부모들은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이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는 일은 드물다. 저자는 “자녀를 돌보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는 사람일수록 삶이 더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의미와 목적을 강화하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이 선택한 고난은 우리가 평소 느끼는 일시적인 쾌락과는 다른 의미의 쾌락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고난은 어디까지나 ‘선택적 고난’일 뿐, 뜻밖에 찾아온 불행이나 불운으로 인한 고난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동안 고통이나 고난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종교나 병적인 영역에 대한 것으로 이해돼 왔다. 책은 우리가 평소 마주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며, 우리가 선택한 고난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선택적 고난은 커다란 즐거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는 의미있다고 여기는 경험의 필수 요소다. 선택적 고난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연결하며, 공동체와 애정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