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설움, 통닭 다리만 못 먹는 게 아니다

2022-06-27     안지섭 기자

“왜 맨날 나한테만 그래, 내가 만만해? 왜 나는 달걀 후라이 안 해줘? 그리고 왜 노을이만 월드콘 사줘? 통닭도 언니랑 노을이한테만 닭다리 주고, 나도 닭다리 잘 먹는데!”

이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등장인물 ‘덕선’(이혜리 분)이 둘째 딸의 서러움을 폭발시키는 장면이다. 덕선의 부모님이 그의 생일을 언니 생일날에 함께 치르려 하자, 이때 크게 마음이 상한 덕선이 그동안 참아왔던 둘째 딸의 울분을 터뜨린 것. 형제 자매 중에서 차녀로 살아왔던 시청자들은 이 장면을 보며 많은 공감을 표했다.

드라마는 무려 34년 전인 1988년을 배경으로 했지만, 대한민국 차녀들의 아픔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전국둘째연합’의 회장을 자처한 이진송씨는 책 『차녀 힙합』을 통해 “‘또 딸’로 태어난 나는 실망스러운 ‘꽝’이고,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고 고백한다.

책이 전해주는 차녀의 아픔은 ‘닭다리를 못 받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출생 순서를 다룬 많은 책에서, 중간에 낀 자녀는 균형 감각을 기르게 되어 이를 바탕으로 훌륭한 중재자로 자란다고 말한다”며 “돌아보면 여러 갈등 상황에서 나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운데 껴서 핸들링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특히 유교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중재와 화합은 자연스레 부과되는 임무”라고 말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같은 특징을 지닌 ‘둘째’와 ‘여성’이 합쳐져 중재자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시너지를 낸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재자의 성격을 갖추게 되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다. 차녀는 자신의 감정보다는 남의 입장을 더 고려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기를 지나치게 낮추는 성향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복닥거리는 가족의 중재자 역할을 하느라 정작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거의 털어놓지 않으며,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아주 나중에 상담을 받으며 알았다(…) 부당한 비난에 직면했을 때, 내가 나를 방어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사과부터 한 적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잘잘못이 명백한 상황이었는데 내가 낀 딸로 살며 갈고닦은 능력을 정작 나에게는 쓰지 못한 것이다” - 『차녀 힙합』 <78쪽>

저자에 따르면 가족은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인정투쟁을 벌이는 ‘치열한 정치적 장소’이다. 또한 저자는 “온전한 애정을 향한 갈망과 우선순위에서 끊임없이 밀리는 주변부의 경험”을 ‘차녀성’이라고 명명한다. 쉽게 말해 꼭 차녀만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자기 가족 중에서 누군가 중재자의 역할을 떠안은 채 소외감을 느끼는 이는 없는지 돌아볼 시간이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