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벚꽃을 기다리며 읽는 향기로운 시

2022-03-31     전진호 기자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멍하니 혼자
외따로 떨어져
선잠을 자든
몽상에 빠지든
발칙한 짓을 하든 <13쪽, 시 「행방불명의 시간」 부분>

새들은 새의 노래를 부르고
꽃들은 묵묵히 꽃향기를 피우는데
어찌하여 인간만이
인간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삐걱대는 것일까 <95쪽, 시 「창문」 부분>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평생
몇 번이나 벚꽃을 볼까요
철들 무렵이 열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아도 칠십 번은 볼까
서른 번 마흔 번 보는 사람도 많겠지
너무 적네
그것보단 훨씬 더 많이 본다는 기분이 드는 건
선조의 시각도 섞여들고 더해지며
꽃 안개가 끼기 때문이겠죠
곱기도 요상하기도 선뜩하기도
종잡을 수 없는 꽃의 빛깔
꽃보라 사이를 휘청휘청 걷노라면
어느 한순간
덕 많은 승려처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자연스런 상태
삶은 사랑스런 신기루임을 <119쪽, 시 「벚꽃」 전문>

[정리=전진호 기자]

『처음 가는 마을』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펴냄 | 192쪽 |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