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단정한 문장을 뚫고 터져나오는 야성적인 목소리 『사육장 쪽으로』

2021-03-23     안지섭 기자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안개가 모든 것을 가려줄 것이다. 이런 안개라면 발가벗어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15~16쪽>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해야만 했다. 파산 통보를 받은 날까지 시간에 맞춰 서둘러 출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돈을 벌어봤자 그들에게 다 빼앗길 테지만 일상을 지키는 것은 중요했다.<42쪽>

높이 솟은 건물 그림자가 그들의 어깨 위로 찬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내는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고개를 뒤로 젖혀도 고층건물에 가려진 밤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둥글고 기다란 콘크리트 철창에 갇힌 느낌이었다.<82쪽>

그들은 박봉을 견뎌야 했다. 단장의 강압적인 지시와 까다로운 규율도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자신의 웃는 얼굴을 견뎌야 했다.<122쪽>

그는 불현듯 자신이 아이에 대해 아는 점이라고는 이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되는 동안 그가 한 일은 회사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156쪽>

『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44쪽 | 1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