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부엌으로 가는 산책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부엌으로 가는 산책
  • 스미레
  • 승인 2020.07.2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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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부엌에 선다. 어릴 적 엄마의 부엌에서 나던 그 살풋한 소리를 떠올리며 밤새 잘 마른 식기들을 정리하고 패브릭을 개킨다. 한결 조심스런 움직임이다. 우리 아가 놀라지 말라고, 또 한편으로는 엄마 여기 있다는 표시인양 그런다.

잠시 서서 녹색 계절이 이리 번지고 저리 스미는 것을 바라본다. 책을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발견하곤 모퉁이를 접어둔다. 새날의 볕뉘 깔린 싱크대와 햇살을 투영하는 유리컵의 신선함을 즐기는 틈새로 커피가 내려지고 밥이 익는다. 하루를 열어내는 감사와 동시에 돌연한 막막함도 밀려온다. 하지만 식탁 위에는 곧 수저가 놓일 것이고, 그 소리가 신호인양 사랑하는 얼굴이 하나, 둘 이곳으로 모일 것이다. 그 다복한 모습을 그려만 보아도 마음이 가라앉는 건, 어떠한 초조와 서늘도 눅잦히는 부엌 훈김의 숨은 공이다.

부엌에는 볕이 드는 창과 아담한 커피 머신이 있다. 꽃과 책과 작은 스피커도 있다. 나의 상냥한 부엌 동무들이다. 이들이 있기에 설거지하며 바흐를 듣고, 국 끓는 냄비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책을 펼친다. 부엌에서 아이는 놀이하듯 실험을 하곤 한다. 아무렴,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여기도 엄연한 ‘방’이니 말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야 먹거리라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 최고로 비싼 것, 귀한 것보다는 자주 가는 슈퍼마켓에 오늘 들어온 신선한 제철 식품을 산다. 아이와 먹을 것으론 그저 순하고 정직한 것이 제일로 여긴다.

부엌에 들어설 때면 '어차피 먹을 거, 뭐.'가 아니라 '어차피 먹을 거니까, 잘' 하자는 마음이되곤 한다. 이런 평범한 엄마들의 마음이 시장을 바꾼다. 부엌에 선 엄마들이야말로 사회의 최전방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미래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키우고 시장의 제품을 바로잡는 사람들이다.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지 않거나 입맛이 없는 날엔 야채수프를 끓인다. '미스트로네' 라는 멋진 이름이 있건만, 우리는 그냥 담백하게 '야채수프'라 부른다. 

냉장고 속 야채를 그러모은다. 한 데 모인 제각각의 모양과 빛깔이 산뜻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 고운 것들을 나박나박 썰어 엄마가 물려주신 냄비에 와락 넣고 끓인다. 형형색색이 푸른 불 위에서 뭉근해진다. 그러면 처음과 달리 농후한 점성이 생기고 모가 깎이며 색과 향도 부드러워져, 마침내 한 접시에 담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요리가 된다. 

이 과정이 개성 강한 합창 단원들의 합창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또는 서툴게 나누고 투박하게 위로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 어우러짐이 끝내는 아름다우니.

스툴을 놓고 불 앞에 앉아 책도 읽고, 정리도 하다가 냄비 속을 들여다본다. 부엌을 메운 훈기에 마음이 누그러짐과 동시에 개운함이 든다. 
오래된 냄비 안에서 맛있는 국물이 무장무장 끓는다. 책을 덮고 같이 낼 빵은 무엇이 좋을까, 고민한다. 작은 부엌의 주인 됨이 행복한 순간이다.

매일 밤 부엌을 정리한다. 종일 보글보글, 달그락달그락 거리던 수다를 겨우 재우고 고요해진 부엌의 불을 끄면, 작은 부엌은 순순히 어둠을 덮는다. 어수룩한 나와 소꿉놀이 하고 아이와 실험하며, 몇 번이고 열을 내었던지라 고단도 할 것이다. 덕분에 오늘도 잘 먹고 잘 살았으니 고마운 마음이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 언저리께. 싱그러운 밤공기를 상상하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수고했어, 나 역시도.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투명한 햇살이 드는 청신한 부엌을 보며 하루 치의 새 힘을 얻는다. 치우는 나와 얌전한 부엌의 선순환이 퍽 대견하다.
하여, 부엌일이 싫었던 적은 없다. 피곤한 날에도 부엌에 서면 미요한 활력이 돌고 때로 콧노래가 나오며 불쑥 설레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집 안 구석구석 부드러운 안온이 감돌고, 아이는 더 많이 웃는다. 그로 인해 나는 또 얼마나 행복했는지. 내가 지은 밥과 수고를 나누는 일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서인가. 늦은 밤 부엌에서 홀로 노란 불빛을 받아내던 엄마의 뒷모습은 늘 평온해 보였다. 

어느 책에선가 '나는 매일 부엌으로 소풍을 간다'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저자는 50대 주부. 까마득한 선배를 올려다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토록 넉넉한 배포를 나는 언제쯤 가져볼 수 있을까. 아직 부엌은 내 놀이공원이 아니다. 육아가 팔 할인데, 부엌일이 즐거운 소풍일 리 없다.

다만, 나는 부엌으로 산책을 나서고 싶다. 산책은 소풍처럼 마냥 흥분되고 달뜨는 일은 아니다. 매일 습관처럼 나서는 그 길에는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바람이 불 수도 있다. 재미가 축포처럼 펑펑 터지지도 않는다. 묵묵한 산책길에서 가슴 뛰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일들은 천천히 거닐며 가만히 들여다볼 때만 살그머니 일어난다. 내겐 말끔히 씻긴 그릇들이, 삶은 행주를 탁! 터는 소리가, 창가에 몸을 맡긴 컵에 스민 햇살의 온기가 그렇다. 화려한 만찬이나 완벽한 살림 솜씨가 아니라.

그런 작은 즐거움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엄마의 손끝이 숫되어도 콧노래 부르며 밥을 짓는다면, 그 밥을 먹고 자란 아이는 비뚤어지지 않을 테니.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부엌을 노닐어 볼 일이다. 산책하듯 새소리를 듣고 식구들과 콜콜한 이야기도 나누며, 한껏 느긋하고 담백하게. 다정한 사이가 그러하듯이.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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