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천재시인 백석이 북한에서 시를 쓰지 못한 이유
[니가 사는 그책] 천재시인 백석이 북한에서 시를 쓰지 못한 이유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7.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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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이라는 평을 받은 천재 시인 백석은 어쩐 일인지 해방 후 북한에서는 형편없는 시를 쓰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시를 쓰지 않고 30여년의 세월을 그저 흘려보내다 죽는다. 소설가 김연수는 8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천재시인 백석이 시를 완전히 내려놓기 전 무의미한 시를 쏟아내야만 했던 감춰진 7년의 세월을 상상한다.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시들은 대부분 못 쓴 작품들이었지만, 같은 시기 최대한 재능을 발휘한 것처럼 보이는 러시아 여성의 시 번역은 백석 시처럼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전처럼 쓸 수 있었지만 일부러 쓰지 않았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중앙일보> 인터뷰 中) 지난 2016년부터 백석을 추적한 작가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백석이 어떠한 사정 때문에 그의 시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후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가무락조개, 나줏손, 귀신불, 이랑, 양지귀, 개포 같은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 백석이 오랫동안 모으고 다듬어온 시어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 시절 시들은 마치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였다. 

“기린아,/아프리카의 기린아,//너는 키가 크기도 크구나/높다란 다락 같구나,/너는 목이 길기도 길구나/굵다란 장대 같구나.//네 목에 깃발을 달아보자/붉은 깃발을 달아보자,/하늘 공중 부는 바람에/깃발이 펄럭이라고,/백리 밖 먼 데서도/깃발이 보이라고.” (백석 「기린」)

소설 속 조선작가동맹 아동문학분과 2/4분기 작품 총화 회의에서 중앙당 문화예술부 문학과 지도위원 엄종석은 백석을 노려보며 그의 시 「기린」을 읽는다. 그리고 왜 하필 기린에게 붉은 깃발을 달았는지 추궁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곰이나 범을 두고 왜 머나먼 아프리카의 기린을 끌고 와 붉은 깃발을 다느냔 말이오? (중략) 동무는 우리의 서정이란 우리나라 아동들의 실지 생활감정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당의 창작 지침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프리카의 기린이라면 거기다가 붉은 깃발을 달든 푸른 깃발을 달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의 동물이어야 붉은 깃발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중략) 이 시에는 주체적인 우리의 생활, 우리의 감정이 없소. 주체적으로 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아프리카의 기린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겠소?”

백석의 동시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뒤로 오랫동안 시 청탁이 끊기고, 백석은 러시아 시 번역일로 근근이 연명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58년 5월 15일 소련이 스푸트니크 3호를 쏘아 올리고, 뜻밖에도 백석이 이를 기념하는 시의 집필자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주필과 편집위원들은 돌아가며 거의 모든 문장에 빨간 줄을 긋는다. 시에 해와 달을 먹는 개와 소련의 과학자 개를 등장시켰다는 이유였다. 그의 시는 타인들에 의해 새로 쓰였다. ‘나는 우주 정복의 제3승리자’ ‘나는 공산주의의 천재’ ‘지칠 줄 모르는 공산주의여’라는 등의 문장이 들어갔다. 그의 문장을 편집하던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빌어먹을 개가 아니라 제3인공위성이 주인공이란 말이오.”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쓴다는 것. 그러자면 쓰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는데, 기행(백석)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비판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아’가 너무 많았다. 그 자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했다.”(53~54쪽) 엄종석은 백석에게 ‘개조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끊임없이 시를 쓸 것을 요구하고, 시를 쓸 때마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벌을 내린다. 그리고 임화, 이원조, 김남천, 이태준 등 문인들을 숙청한 것처럼 백석 역시 겨울에 영하 40도 가까이 떨어지는 삼수로 보내버린다.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그 가슴 속에 터지듯 불끈/맹세 하나 솟아올랐단다/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백석 「나루터」)

1962년 5월 삼수의 협동조합에서 일하던 백석은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 「나루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작가 김연수는 이 기나긴 침묵을 “결국 이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 시를 쓰는 능력을 상실해 63년부터 시를 발표하지 않은 게 아니라 스스로 안 쓴 것 같다”고 해석한다. 창밖은 온통 차가운 겨울, 소설 속 백석은 긴긴밤을 지새우며 시를 썼다가 그것을 난롯불에 태우기를 반복한다. 

한편, 소설가 최은영은 이 작품에 대해 “시인이 살았던 세상처럼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슬픔을 모르는 인간, 고독할 겨를이 없는 인간’을 바라는 것 같다. 슬픔조차도 비생산적인 감정으로 배척되는 세상에서 어디에도 쓸모없는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일, 그렇게 계속 글을 써나가는 일은 어리석고 그 어리석음의 크기만큼 아름답다”고 평했다. 어쩌면 이 세상에도 백석이 살았던 세상의 부조리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여운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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