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 책에는 조선의 왕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일곱명 후궁들의 발자취가 담겼다. 역사 속에서 흐드러졌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일곱 후궁들의 생애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광해군은 즉위한 후인 1610년(광해군 2년) 3월 29일에 어머니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공빈 김시를 왕후로 추숭하는 데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중략) 광해군은 이런 말을 들어가면서도 끝내 자신의 어머니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고 남편인 선조 곁에 그녀의 신주를 봉인했다. 광해군은 그녀를 왕후로 추숭하는 데 홍문관이 반대를 청했지만 끝내 불허했다. (중략) 공빈 김씨는 광해군 2년에 공성왕후로 추숭되고, 성릉(成陵)이란 능호까지 받았지만 일장춘몽이 돼버렸다. 아들 광해군이 몰락하면서 1623년(인조 1년) 3월 18일에 다시 후궁으로 강등됐다.<34~40쪽>
희빈 장씨는 왕을 낳은 어머니이기에 7명의 후궁들 신주가 모셔져 있는 칠궁에 그녀의 신주도 자리하고 있다. 그녀의 사당은 대빈궁이다. 대빈궁은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경종은 1722년(경종 2년) 희빈 장씨의 사당을 경행방 교동에 건립했다. 그 후 1870년(고종 7년)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1887년(고종 24년) 원래의 자리 경행방으로 옮겼다. 그러다 1908년(순종 2년)에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66~67쪽>
영빈 이씨는 친정 가문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버린 매정한 어머니로 평가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지켜주지 못했던 그 아들 사도세자 덕분에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에 신주도 자리하게 됐다. 아니 그녀의 아들이 낳은 손자 정조 덕분이다. 그녀는 아들 사도세자가 광기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그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가슴은 찢어진 채로 살다가 눈물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는 영조의 제2후궁으로 영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왕의 여인이다.<182쪽>
『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
홍미숙 지음│글로세움 펴냄│232쪽│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