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현 선수는 ‘그사세’의 피해자입니다
최숙현 선수는 ‘그사세’의 피해자입니다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7.09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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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발 디딘 팀이 경주시청이었고 감독과 주장 선수의 억압과 폭력이 무서웠지만 쉬쉬하는 분위기에 그것이 운동선수들의 세상이고 사회인 줄 알았다. 선수생활 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숙현 언니와 함께 용기 내어 고소를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숙현 언니와 유가족에게 죄송하다.”

“운동선수들의 세상”
지난 6일 국회 소통관에서 고 최숙현 트라이애슬론 선수의 동료였던 경주시청 소속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흘러간 드라마 제목처럼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진 참혹한 가해와 피해. 이 이상한 세상에서는 불합리한 폭력과 차별이 용인됐다. 마치 그러한 법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쩐지 익숙하다. 아니, 우리는 사실 언제고 바깥세상과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준비가 돼 있다. 가령 노래방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은 180도 다른 사람이 된다. 노래방이라고 적힌 공간에 들어갔을 뿐인데 별짓을 다한다. 떼창을 하고, 춤을 추고, 누군가는 소화기를 들고 촬영 감독이 된다. 특정 상황을 설정해 역할극을 벌인다. 노래방이라는 공간에서 바깥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 것이다.

문화심리학자 한민은 책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에서 외국인들은 노래방에서 이렇지 않다고 말하며(가령 일본인들은 얌전히 노래만 부른다) 한국인들은 상황에 따라 역할을 설정하고, 거기에 의도적으로 몰입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공감이 된다. 

뉴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회사원들을 보자. 누군가는 조직의 보스를 위해 서슴없이 불법을 저지른다. 그 누군가는 회사 바깥에서는 존경받는 아버지이자, 남편이며, 언제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준비가 된 착한 시민이지만, 조직 안에서는 마피아다. 또 누군가는 밖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에 분개하지만, 정작 조직에서 벌어진 성폭력에는 쉬쉬한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디 뉴스에 나오는 이들뿐인가. 예수의 말처럼, 죄 없는 사람만 돌을 던져라. 밖에서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을 특정 상황과 장소에서는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가령 콜센터 상담원에게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언제고 ‘그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태연하게 폭력과 차별, 불법을 저지른다. 

유명한 실험이 하나 떠오른다. 1971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각각 수감자와 간수 역할을 부여하자 간수 그룹이 수감 그룹을 학대하기 시작했다는 그 실험. 몇 년 전 누군가 이 실험의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했지만, 충분히 있음 직한 일이기에 이 실험은 여전히 회자된다. 우리 모두 특정 상황과 장소에서는 누군가의 간수가 되고 죄수가 된다. 

“선수생활 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숙현 언니와 함께 용기 내어 고소를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숙현 언니와 유가족에게 죄송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사는 세상’의 패악을 끊어낼 수 있을까. 권석천 JTBC 보도총괄은 책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잘못된 것을 알고도 본인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말하지 않는 ‘침묵의 문화’를 이러한 세상의 바탕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침묵의 문화는 침묵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란,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 시간을 늦출 뿐이다. 침묵하는 자도 희생될 수밖에 없다”며 “악이 승리하려면 선한 자들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라는 영화 <갱스터 스쿼드>의 대사를 인용한다. 

물론, 당하는 사람은 결코 죄가 없으며, 이들에게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잘못은 오롯이 가해자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며, 이 세상 속 악(惡)은 피해자와 잠재적인 피해자가 용기를 내지 않는 이상 계속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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