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는보리’ 김진유 감독 “장애인의 삶을 편견 없이 그리고 싶었어요”
[인터뷰] ‘나는보리’ 김진유 감독 “장애인의 삶을 편견 없이 그리고 싶었어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6.26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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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보리>를 연출한 김진유 감독 [사진=안경선 PD]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문화학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책 『호모 루덴스』에서 ‘축제’(festival)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축제는 ‘일상생활의 공간적 분리’를 바탕에 두고,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진지한 집중’과 그에 따른 일종의 ‘생활의 정지’ 등을 기반으로 한다.

하위징아가 제시한 축제의 특징은 영화의 그것과도 닮았다. 영화는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듯한 공간’에서 상영되며 그 공간에서 관객은 ‘진지한 집중’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목도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생활이 정지’되는 오묘한 느낌을 받는데, 그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영화적 체험’일 것이다.

영화 <나는보리>가 선사하는 영화적 체험은 축제의 즐거움과 맞닿아 있다. 영화를 연출한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놀이의 장을 마련한다. <나는보리>의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다. 영화(榮華)로운 영화(映畫). 스크린 안팎의 사람들을 모두 빛나게 만드는 축제와 같은 영화.

코로나19의 악조건 속에서도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몰이를 하고 있는 <나는보리>의 김진유 감독을 <독서신문> 사옥에서 만났다.

Q. <나는보리>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제20회 가치봄영화제에서는 대상을 수상했다. 소감이 궁금하다

A. 운이 좋았죠. (웃음) 제가 특별히 잘나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기보다는 결국 이야기의 힘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보리>는 저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얻어낸 영화가 아니라 그동안 만났던 ‘농인’(聾人 : 청각장애인) 분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거거든요. 그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Q. 기억에 남는 관객의 반응이 있다면?

A. 아무래도 농인 관객들의 반응이 기억에 남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대개의 농인 부모들은 자신과 같은 농인 자녀를 원한다고 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어떤 농인 분이 제게 와서 자기는 영화 속 주인공인 보리처럼 ‘청인’(聽人 : 청력 소실이 거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자녀를 원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런 반응을 듣는 게 감독 입장에서는 굉장히 흥미로워요.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니까요.

비장애인 관객들의 경우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돼서 좋았다”라는 얘기를 가장 많이 해주셨어요. 저 역시 영화를 만들면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편견 없이, 보통의 시선으로 바라봐주길 바랐거든요. 그리고 어떤 관객은 영화 보고나서 수화를 배워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쨌든 그런 반응을 들으면 제가 영화를 찍으면서 목표한 바를 이룬 거니까 되게 보람차고 행복해요.

Q. 원래부터 영화를 좋아했나?

A.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 때, 350명 중에 349등을 했어요. 근데 그 350등 한 친구가 운동부였어요. 사실상 제가 꼴찌였던 거죠. (웃음) 그때 성적표를 보면서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라는 고민에 빠졌죠. 그러다가 ‘강릉 시네마테크’(영화 관련 자료실 또는 실험 영화 극장)라는 곳을 알게 됐어요. 원래 영화를 좋아했는데, 거기서 주최하는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자원봉사자 활동을 하면서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특히 거기서 상영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독립·예술영화라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결이 다르잖아요? 그때 영화를 보면서 ‘이런 것도 영화가 돼?’ ‘저런 건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영화제를 하면서 영화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분들과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던 순간들이 지금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Q. 영화는 ‘청각장애’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첫 단편 <높이뛰기> 역시 장애를 소재로 했다. 계속해서 장애인과 관련한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는지?

A.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농인이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농인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어요. 영화는 찍고 싶은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하다가 <높이뛰기>라는 단편을 찍게 됐죠.

<높이뛰기>를 찍고 난 뒤에 영화가 가치봄영화제(구 장애인영화제)에서 상영을 하게 됐어요. 그때 농인 분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어요. 그 이후에 모임에도 여러 차례 참석했고, 제가 몰랐던 농인들의 생각이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부모님 외의 농인 분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없었거든요. 그분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는보리>를 만들게 됐어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스릴러 영화를 좋아해서 첫 영화는 스릴러가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웃음)

Q. 열한 살 소녀 ‘보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가족 안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끝에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장애인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한 소녀의 성장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A. 누구나 ‘성장통’이라는 걸 겪잖아요? 영화에서 보리가 겪는 일련의 일들이 바로 성장통인거죠. 근데 그 성장통이 오직 보리만이 겪는 특별한 고통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제 목표 중 하나는, 관객들이 보리의 성장통을 딴 세상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비슷한 일의 하나로 느꼈으면 하는 거였어요. 동시에 보리가 성장통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관객들이 지켜보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김진유 감독 [사진=안경선 PD]

Q. 보리의 성장에 친구 ‘은정’의 도움이 컸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보리가 부러웠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은정과 같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였는데, 감독의 생각은 어떤가?

A. 저한테도 은정이와 같은 친구가 있어요.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젊은 남자 선생님’이에요. 어렸을 때, 그 친구가 집에 놀러왔는데, 우리 부모님을 만났을 때 아무렇지 않게 대했어요.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니까 뭔가 친구 입장에서는 조심스럽고 어떤 경우에는 불편할 수 있는데, 오히려 더 잘 이야기하고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돌이켜보면, 제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그런 풍경이 너무 소중하고 중요하고 필요했어요.

Q. 풍경이 참 아름다운 영화다. 촬영 장소가 강릉 주문진 일대로 보이는데, 장소 섭외나 로케이션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A. 제가 실제로 주문진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어디가 예쁜지, 소위 여행객들이 말하는 ‘로컬’을 잘 알고 있으니까 장소 섭외와 같은 로케이션이 더 효과적으로 된 측면이 있어요.

또 영화에 동네 주민들이 출연하는데, 그 주민들이 전문 연기자가 아니라 다 저희 친척이에요. (웃음) 어머니, 큰엄마, 큰고모가 전부 주문진 일대에 살고 계시거든요. 한 번은 촬영 때문에 며칟날 어디로 오라고 했는데, 한껏 꾸미고 오신 거예요. 동네 주민처럼 나와야 하는데… 저희가 그렇게 오실 줄 알고, 아주머니들이 잘 입는 통바지 같은 걸 사전에 준비했어요. 평상시 모습이 그대로 나올 수 있게 화장도 지워드리고. (웃음)

그리고 제가 제작까지 맡았기 때문에 촬영 기간에 다른 동네에서 숙소나 식당 같은 걸 섭외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애초에 시나리오를 쓸 때 그런 것들을 염두하고 썼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문진은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공간이니까 장소 섭외도 용이했고, 또 촬영 중간 중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근처에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랬어요. 그러면 친구들이 일하다 말고 촬영에 필요한 소품 같은 걸 갖다 줬어요. 너무 고맙죠.

Q.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장면이 묘하게 이어진다. 화면 안으로 보리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누군가를 바라보며 해맑게 인사한다. 그리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오프닝과 엔딩에서의 이러한 반복이 같은 듯 다르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는데, 어떤 의도가 담겼나?

A.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를 전반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객에게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야하는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이 영화는 보리가 주인공이고, 보리는 천천히 걸어 갈 거고, 영화는 이러한 빠르기로 흘러 갈 것이라는 메시지가 깔린 장면이에요. 말하자면 “이 영화는 보리가 천천히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라는 걸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엔딩 시퀀스에서도 동일하게 보리의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보리가 그 동안 성장을 했고, 앞으로도 보리는 이렇게 천천히 걸어 갈 것이고,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삶을 유지한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Q. 영화에는 유달리 보리 가족의 ‘짜장면 먹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A. 시나리오 쓸 때까지는 몰랐어요. 오히려 촬영하면서 ‘근데 오늘도 짜장면을 먹네?’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나중에 <나는보리>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에 가족과 함께 우연히 집에서 짜장면을 먹는데, 문득 생각이 났어요. 우리 가족이 한 번도 외식을 한 경험이 없다는 걸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에게는 짜장면을 시켜서 먹는 게 큰 외식이었던 거예요. 비록 집에서 먹는 거지만, 외식 아닌 외식인 거잖아요? 시나리오 쓸 때는 몰랐고,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또 제가 이 시나리오를 2016년도에 썼는데요. 뭔가 치밀하게 계산하고 쓴 게 아니라 비유하자면 ‘쭉 밀고 나간’ 시나리오예요. ‘이런 장면 뒤에는 이런 장면이 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써내려간 시나리오다보니 아무래도 식사 장면도 많고, 보리 아빠가 맥락 없이 소파에 누워서 잠자는 장면도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Q. 보리의 남동생 ‘정우’의 캐릭터 설정이 흥미롭다. 자칫하면 정우가 보리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었지만, ‘축구 신동’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정우에 관한 감독의 연출적인 고민이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A.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보리>는 판타지 같은 측면이 많은 영화예요. 영화의 전반적인 톤은 농인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지만, 날카롭게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부분이 분명 있거든요. 근데 그걸 또 과도하게 부각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제가 이 영화를 만들 때,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편견 없이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정우는 그런 맥락에서 탄생한 캐릭터예요. 정우를 단단하고 강인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제가 실제로 만난 농인 분들도 그랬어요. 되게 단단하고 강인하게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김진유 감독 [사진=안경선 PD]

Q.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보리가 친구인 ‘은정’과 함께 ‘팔백 년 된 나무’ 밑에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는 모습을 카메라가 꽤 오랫동안, 멀리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두 소녀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이 장면을 찍었는지 궁금하다.

A. 그 장면은 영화의 절반 이상이 진행된 이후의 상황인데,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리가 나름대로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정말 소리를 잃고 싶은 건지 자신도 헷갈려하는데, 그런 고민들이 은정이와의 대화에서 좀 표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나무가 실제로 팔백 년이 된 나무인데, 나무라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 혹은 신성함 같은 게 있잖아요? 보리는 그 순간 말고도 자주 그 나무를 봤을 텐데, 말하자면 나무는 그대로인데 보리의 마음이 달라졌단 말이죠. 그 차이에서 오는 신성함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들이 관객들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큰 나무가 뒤에 있고, 든든한 친구가 옆에 있고, 보리가 그런 공간과 존재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잘 성장하지 않을까?’라는 메시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어요.

Q. 이 영화는 청각장애인의 일상적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비장애인인 보리를 통해 그것을 역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럼으로써 영화가 장애인을 묘사할 때 빠질 수 있는 여러 함정과 고정된 견해를 자연스럽게 극복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와 관련해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A. 소수자가 아닌데 소수자를 연출하는 사람들이 있죠. 쉽게 말해서 당사자성이 없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만 끌어오는 건데, 그런 사람들이 만든 영화중에 일부는 동의할 수 없거나 불편한 지점들이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영화를 볼 때면, 연출자가 연출자로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꼭 당사자성이 있어야만 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결론은 충분한 공부와 교감이에요. 내가 당사자성이 있든 없든, 연출자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백퍼센트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감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해요. 본인의 목표를 위해서 이야기만 끌어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Q. 감독이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장면이 있다면?

A. 소리가 안 들린다고 연기했던 보리가 모기장 안에서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장면을 찍을 때, 제가 처음으로 모니터에 빨려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계속 보고 싶어서 컷을 못했어요. 여러 감정이 겹겹이 쌓여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보리와 같은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잖아요? 정말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그런 순간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성장이라는 걸 하고 또 어른이 되는 거니까. 찍으면서도 참 여러 느낌이 교차했던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A. 지금 두 가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요. 이제 마무리 작업 중이에요. 하나는 20대 여성 농인이 주인공인데, 그 여성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예요. 또 하나는 서핑남하고 해녀와의 사랑 이야기인데 보리 부모님 역할을 맡았던 곽진석, 허지나 배우가 출연할 예정이에요. 재밌게 찍고 싶은 영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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