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 여성 심시선. 세계적인 화가들과의 염문설, 두 번의 결혼, 기존 관념을 뒤집는 파격적인 발언 등으로 주목받는 신여성의 삶을 살다간 그를 위한 특별한 제사 이 책의 주요 소재다.
시선은 살아 생전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봤자 뭐하겠습니까?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며 제사를 부정했지만, 장녀 명혜의 주장에 따라 시선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하와이에 모인다. 사후 10주기를 맞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행될 제사를 위해.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소설은 여성 중심의 삼대 이야기로 전개된다. 시대의 폭력과 억압에 반기를 들었던 심시선과 그의 딸 명혜, 명은, (둘째 남편의 자식인) 경아 그리고 손녀 화수와 우윤까지 심시선에게서 뻗어나온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첫째 명혜는 집안을 이끄는 당찬 여성, 둘째 명은은 독신의 삶을 즐기는 자유로운 여성, 경아는 무난한 자질을 지니고도 오래 견디는 여성으로 다채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까만 고양이를 실수로 밟으면 안 되니 센서등을 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며느리 난정, 인간에 의해 죽어가는 새들의 처지에 분노하는 경아의 딸 해림, 유조선 침몰 소식에 새들을 씻기러 떠나는 명혜의 둘째딸 지수까지 평범 속에 특별함을 지닌 여성의 어떠함이 책 속에 가득 묘사됐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밝혔는데, 그래서인지 소설 속 남성들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잠자리 곤충을 연구하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우는 명혜의 남편 태호는 육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로, 시선의 장남 명준은 (시선으로부터) "만날 '걔…?'"라고 불린 "착한 척하며 사실은 심지 없는 놈"으로 묘사된다. 대기업에 다니는 명혜의 첫째 딸 화수는 협력업체 (남성) 사장이 자행한 염산 테러의 피해자인데, 그의 남편 상헌은 그런 화수의 아픔을 넉넉하게 품어주지 못하는 남자로 그려진다. 다만 그런 설정이 줄거리가 뻗어 나가는데 균형을 잃을 정도는 아닌데, 이를 통해 저자는 기 센 여자들이 아닌 기세 좋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들어낸다.
김보라 영화 감독은 "책 읽으며 무척 행복했다. 이 책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며 "가부장제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이 가장이 될 때, 가족들이 어떠한 결을 갖고 살아갈지에 대한 기분좋은 전망을 준다"고 이 책을 추천했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펴냄│340쪽│14,000원